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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Apr 23. 2022

그녀들의 리모델링

    

“어머니, 이거 다 버리자. 무슨 된장통이 아홉 개나 있노?”

“아 그거 버리면 안 되는 거라. 이건 유동자가 준 거고 이건 함덕 언니가 준 거고...”

“아니 그래도 이거 좀 먹기 그런 거 같은데? 안 그르나 **아.”

“그래 엄마, 매실이 이거 술이 다 됐겠다. 오래된 것 같은데 매실통 먼지도 많고...버려야겠지 새언니?”

“이 눔의 딸들이 뭘 모르고 다 버리라고 하네. 이제 내 편 왓쪄이.”     


이번엔 꼭 다 버려버리겠다는 형님의 의지와 빼놓은 된장통을 은근슬쩍 다시 챙기는 어머니, 그리고 병적일 정도로 깔끔한 시누이까지 세 모녀의 밀당이 한창이다. 그 밀당 끝 은근한 압박의 눈길이 내게 머문다. 며느리인 나는 그 누구 편도 들지 못한 채 둘 곳 없는 눈길만 휘청거린다.     


4월이 되면서 학교에서 퇴직한 형님과 코로나로 한껏 신경이 곤두선 생활 때문에 힘들어 하던 시누이가 마산과 서울에서 한꺼번에 내려왔다. 평소처럼 며칠 정도가 아니라 꼬박 한 달은 있을 예정이다. 물론 아무 생각 없는 나는 시누이들이 내려온다고 해서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특히 막내 시누이 하고는 밤새 술 마시며 속 얘기를 할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라 같이 못 놀아 주는 게 조금 아쉽다 여길 뿐이다.   

  

시누이들의 장기간 단체 방문은 어머니 집의 리모델링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시는 빌라가 오래된 집이라 올 때마다 문이며 씽크대며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찬 작은 방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가까운 곳에 며느리가 살고 있지만 살림에 딱히 재능과 관심이 없어 뭐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에 팔 걷어 부치고 내려온 것일 터. 이쯤 되면 괜히 며느리인 내 입장이 조금 민망해진다. 더 민망한 건 모든 작업 과정에서 며느리는 발 벗고 나설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들쑥날쑥한 수업 시간과 주말엔 고3 수험생 픽업 일정으로 그저 사이사이 오다가다 들러서는 쑥 훑어보고 좋다 좋다 말만 거들다 올 뿐이다. 감독관의 포지션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집 명의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라 괜히 내꺼 챙긴다 생각할까 조심스럽기도 했다. 그저 시누들의 처분대로 조용히 따라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았던 건 세 오누이가 모아오던 회비에서 경비를 쓰기로 하고 편하게 모든 작업을 맡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길어야 일주일이면 다 끝내고 세 모녀가 좋아하는 산으로 들로 고사리며 두릅이며 달래를 하러 다녀보기로 얘기가 다 된 상태였다.


그러고도 벌써 3주를 넘겼다. 리모델링에 로망을 가지고 있던 아주버님이 욕실만 한 번 해 볼까 하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첫 단추를 저리 끼워두고 일찌감치 올라가버린 아주버님이 쏘아올린 후폭풍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욕실의 셀프 리모델링은 작은 방의 벽지와 방방마다의 커텐 작업, 부엌 타일 작업에 방문과 철문의 난이도 있는 작업까지, 다이소 매장 하나쯤은 거뜬히 옮겨 놓은 듯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온통 봄빛의 설렘을 가지고 있던 시누이들도 어머니도 모두 지쳐 버린 것이다. 특히나 지금쯤이면 고사리 코인사에 한참일 것을 딸들의 잔소리(?)로부터 오래된 물건을 사수해야 하는 어머니의 난감함은 참으로 커 보였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아니 어머니, 이걸 왜 못 버리는데? 딸들이 이 낡은 물건들 치우는 거 힘들어 하면 그냥 싹 버려불자 하는 게 그리 힘드나?”

“엄마, 언니도 지금 힘들어서 입술 다 터지고, 오빠도 쉬는 날마다 와서 이러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딸들의 계속되는 성화에 결국 어머니가 폭발하셨다.

“나 이 집 고치기 전까지 편안하게 살앗쪄. 니네 보기 지저분해 보여도 하나 신경 쓰는 거 없이 지냈는데 응,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신경 써야 되냐 응? 너네가 한다니까 너네 마음 편하라고 하라고 한 건데 너네 이렇게 힘들고 나 이렇게 잔소리 들으멍 할 거였으면 안했을 거라.”     


내.가.살.면.얼.마.나.산.다.고...그리고 정적. 결국 그날 형님도 시누도 어머니도 모두 쉬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냈을 거다. 딸들은 딸들대로 어머니가 섭섭했다가 죄송했다가 했을 테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섭섭했다가 미안했다가 그 말까지는 말 걸 후회했다가 했으리라는 건 안 봐도 비디오다.

“형님, 이건 나중에 제가 요렇게 가릴 만한 걸로 싹 해 놓을게요. 그럼 될 것 같은데요.”

“고모, 이건 똑같은 병 사다가 어머니랑 같이 정리해 놓으면 되크라.”

“어머니, 요것만 나도 가져가고 이걸랑 우리 집에도 많으난 좀 버려불게요.”


어제의 사달로 모두가 어색할까 내가 바빠진다. 머쓱하긴 했지만 서로 미안한 마음들이 왈칵 하는지라 그만그만하게 지나간다.

“어머니, 이제 조금씩 정리만 하면 될 거난 쉬멍쉬멍 하고 내일은 형님하고 고사리 하러 댕겨옵서. 고사리 막 하영 해 왐선게마는.”

“그럴까?”


못 이기는 척 대답하는 어머니 뒤로 형님의 얼굴도 펴진다. 그렇게 그녀들은 세 번의 고사리를 하러 다녀왔다. 물론 어머니 집 정리는 딸들의 욕심대로 깔끔하게 마무리된 상태는 아니다. 여전히 버리고픈 물건들이 빼꼼히 보여 한껏 외면해야 하는 형님과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 사이사이 시누이의 옅은 한숨 소리도 들려온다. 끊어온 고사리를 삶고 말리면서 다 낡은 큰 솥을 조용히 옮겨 놓는 어머니의 모습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안다. 그녀들이 리모델링한 것은 집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집이 그 마음을 기억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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