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9. 7:32*
# 꿈과 열정의 대가
2018. 5. 19. 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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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편의점 파라솔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 물론 편의점에서 산 거다. 그게 공정한 거니까. 편의점에서 산 건 편의점에서 소비해 주는 것.
늦어버린 파라솔은 햇살을 제대로 가려주는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폭염을 비가 조금 쓸어간 듯했고, 담배 한 개비와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그때 낯익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쁘게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발길을 멈췄다. 뮤지션은 나지막한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그의 앞에 사람들이 모이자 더욱 열창하기 시작했다.
<장밋빛 인생>으로 잘 알려진 에디트 피아프를 생각했다. 카바레에서 길거리 가수 생활을 하다 발탁되어 순식간에 유명 가수로 떠오른 그녀를. 이 뮤지션도 언젠가 화려한 무대를 꿈꾸며 오늘도 거리에서 자신만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꿈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거야. 혹시 힘드시더라도 꿈만은 포기하지 마요."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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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대학원 시절, 비주류 건축집단의 은사였던 토마스 한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집이 부자냐?"
"아뇨."
"혹시 아버님이 전·현직 장관이냐?"
"아뇨."
"그럼... 건축을 계속할 거면 결혼은 포기해라."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핵심을 찔렀다.
"건축가는 엘리트의 직업이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반발도 했었지만, 지금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한때 건축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치기 어린 생각도 했었지만, 건축을 한다는 것, 영화를 한다는 것, 소위 크리에이티브에 종사한다는 것은 겉보기엔 폼이 나 보이지만 실상은 열악한 3D업종이다.
소위 '열정페이'. 갑의 입장에서는 '적은 임금으로 열정을 제공받는 것'이고, 을의 입장에서는 '적은 임금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뭐라 정의되든 상관없다. 을의 입장이든 갑의 입장이든, 열정페이든 아니든, 일종의 대가 치름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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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순간**
나는 이 단어를 떠올릴 때 어설픈 길거리 뮤지션을 생각한다. 모방하는 듯 기타를 치고 젬베를 두들기며 유행가를 어설픈 창법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면, 박수보다는 조소가, 그리고 애처로움이 새어 나온다.
'그들이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졌을까?' 그렇다면 저런 음악을 무작정 남에게 들려줄 용기는...
예술의 탈을 쓰고, 디자인의 탈을 쓰고, 그 조잡함을 토하는 것들이 넘쳐난다.
예술가는 다 배고픈 게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예술가가 배고프다.
혹시 당신은 특별한가?
그저 그런 아티스트는 대학 동아리에도 넘친다. 피를 깎는 노력 없이 조금 뛰어난 재능에, 조금 남보다 암기력이 좋았다는 이유로,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것으로 인서울 했다는 정도에 기댄 예술가를 자처하고 열정을 운운한다면, 그 열정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성공하려는 열정, 재능을 과시하고 싶은 열정일 뿐이다.
내가 그랬듯이. 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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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조언**
지금은 천상병 시인의 삶과 류시화의 삶을 비교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환상을 버릴 것.
편집자로 살아남을 것.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효과적으로 팔아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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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사실 이 글은 특별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서, 그리고 쉽게 가려는 열정과 과시적 열정을 경계하려는 것이며, 그에 자유로울 수 없는 나를 채찍질하는 반성의 글이다.
'열정페이'는 갑과 을의 입장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보다는, 일종의 대가 치름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 합의보다는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뒤늦게 소위 열정페이를 선택하여 그 길을 가고 있고, 후배들을 착취하는 업자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작은 미안함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선택이다. 내 선택이었고, 그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꿈은 아름답다. 하지만 꿈만으로는 살 수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진짜 어른이 되는 첫걸음이다.
길바닥에서 낮부터 걷고 있는 '하백'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