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0. 3:51
포숙을 그리는 난, 결국 관중이지 못했다.
염치가 뭔지 알겠나.
생존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우아한 아줌마를 시장바닥 억척순이로 만들어버렸고, 꿈꾸는 젊은이를 현실에 절어버린 늙은이로 만들어버렸다. 그게 내가 한 일이다.
자존심? 그런 거 지킬 여유가 어디 있나.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인데. 비굴해졌다. 인격의 독립이라니, 그런 거 난망하다. 남에게 의존하고, 없으니까 받아도 마땅하다는 이상한 논리까지 생겨났다.
이게 무슨 논리냐. 없으니까 받아도 마땅하다니. 개소리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한심하다. 정말 한심해.
헌신을 배워본 적이 없다. 주는 것이 얼마나 큰 노력인지도 몰랐다. 선하지도 않다, 나는.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다. 죽지 않고 버티고 싶었을 뿐이다.
염치와 평판을 생각한다. 이제 와서. 늦었다. 너무 늦었어.
그런데 말이야, 관중이 포숙을 그리워했다는 건 안다.
전한 시대 무제의 태사령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관안열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이야기 말이다.
가난할 때 장사를 같이 했는데 관중이 더 많이 가져가도 포숙은 탐욕하다 안 했다. 가난한 줄 알았거든. 아, 이런 친구가 세상에 있을까 싶다. 일을 계획하다 실패해서 더 곤궁해져도 어리석다 안 했다. 경기에 따라 유불리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
세 번 벼슬하다 세 번 쫓겨나도 부덕하다 안 했다. 때를 못 만난 줄 알았거든. 이런 이해가 어디 있나. 세 번 전쟁에서 세 번 도망쳐도 비겁하다 안 했다. 늙은 어미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
공자 규가 패하자 소홀은 순사 했지만 관중은 사로잡혀 부끄러움을 당했다. 그래도 포숙은 무치한이라 안 했다. 작은 의리보다 큰 공명을 세우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았거든.
이해한다는 것. 그게 사랑이다.
그래서 관중이 말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것은 포자다."
포숙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무치한이라 해도 이해해 줄 그런 친구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난 누구의 포숙이었나. 누구를 그렇게 이해해 줬나. 남의 실패를 이해해 주고, 남의 도망을 이해해 주고, 남의 비겁함까지 이해해 준 적이 있나. 없다. 한 번도 없다.
나는 포숙이 되지 못했으면서 포숙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다. 참 이기적이다. 정말 이기적이야.
예전엔 남이 내게 잘해주면 열 배로 갚고, 해코지하면 백 배 천 배로 갚겠다고 이를 갈며 살았다. 그게 내 인생철학이었다. 복수야말로 인생의 활력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그냥 고마워하고 싶다. 내가 베푼 건 잊어버리고 싶다. 오래 기억하지 않으리라.
이 밤이 시킨 감성일까. 아니면 늙어서 그런 걸까.
천수답에서 비를 기다리는 제사장이라니. 참, 운치 있는 표현이지?. 나도 그런 제사장이다. 메마른 땅에서 은총을 기다리는 제사장.
가뭄이 길다. 정말 길어. 오후 바람이 비를 부를 것 같더니 결국은 그냥 바람이었다. 허망하다.
그런데 말이야.
포기할 수는 없다. 아직은.
난 아직도 관중이 되지 못했다. 포숙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포숙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의 관중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포숙이 되어주는 것. 그게 인생이란 거 아닌가.
이해받기만 원하지 말고 이해해 주자. 사랑받기만 원하지 말고 사랑해 주자. 용서받기만 원하지 말고 용서해 주자.
이 가뭄 같은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가 되어주는 것. 그게 사람 사는 이치 아닌가.
누군가 내게 탐욕하다 해도 그 사람의 가난을 이해해 주자. 누군가 내게 어리석다 해도 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자. 누군가 내게 비겁하다 해도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해 주자.
그런 포숙이 되어보자. 관중을 기다리는 포숙이 아니라, 관중을 만들어주는 포숙이 되어보자.
세상에는 관중이 너무 많고 포숙이 너무 적다. 모두가 이해받고 싶어 하고, 아무도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사랑받고 싶어 하고, 아무도 사랑해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이 모양인 거다.
오늘 밤, 나는 포숙을 그리며 관중을 꿈꾼다. 아니다. 관중을 그리며 포숙이 되기로 다짐한다.
생존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우아함을, 꿈을, 자존심을, 염치를.
아니, 되찾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들어보자. 더 단단한 우아함을, 더 현실적인 꿈을, 더 유연한 자존심을, 더 깊은 염치를.
그리고 헌신을 배워보자. 주는 것이 얼마나 큰 노력인지 배워보자. 선해지는 법을 배워보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 않던가.
이 밤, 가뭄 끝에 내리는 비처럼,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한다. 포숙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한다.
염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