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초적 삶

2012. 2. 23. 4:27

# 마초적 삶



안녕하세요. 또다시 시작한다. 새벽이다.


밤도깨비 제사장이다. 그런데 글 서두에 "안녕"이란 말 빼고 무엇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다. 이제는 너무 식상하다. 천수답에, 밤도깨비에, 스토리텔링을 통한 캐릭터화에도. 너무 많은 이미지는 치명적이다.


스물일곱.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때 천재라 불렸던 이상. 왜 나는 요절한 작가에게 그토록 끌렸을까. 전혜린까지.


어쩌면 이것이 내 젊은 날의 어두운 초상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단편집이 몇 권 있다. 문득 손이 가서 책을 펼쳤을 때, 선명한 볼펜 자국으로 줄 쳐진 문구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언제 어느 시점에 무슨 생각으로 줄을 쳤을까. 내가 그때 그 문구에 왜 매력을 느꼈을까.


그땐 사내라면 모름지기 이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102페이지.


"내게서 버림을 받은 계집이 매춘부가 되었을 때, 나는 차라리 그 계집에게 은화를 지급하고 다시 매춘할 망정, 간음한 계집을 용서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잔인한 악덕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나의 젊은 시절은 어떠했던 것일까. 아주 생소한 느낌이다. 그야말로 마초적 삶이었다. 이상적이었다.


그렇다. 어린 시절 이상은 나에게도 이상이었던 때가 있었다. 건축학도라면 열병처럼 빠져들었던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의 언어의 구조적 현학이랄까.


다만 지금 이상은 나에게 이상일뿐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 일견 굉장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내 젊은 날의 나는 그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딱 거기까지다.


이상은 모순, 상반, 대립을 그의 시어로 사용했다. 조금은 나름 젊은 혈기,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무엇을 더 말하랴. 그가 만일 젊어 죽지 않았다면, 또한 전혜린은 어떠했을까 생각한다.


내 젊은 날이 생소했던 시간이었다. 한때 치기 어린 젊은 시절 마초적 삶이 내 인생의 전부였을 때, 딱 서른까지만 살자고 결심했던 그때나 가능한 삶이 아니었을는지.


앞 글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용서한다는 것은 치대의 악덕이다. 간음한 계집을 용서하여 보아라. 한번 간음에 맛을 들인 계집은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간음하리라."


나 자신을 고백하건대, 여기에서 간음한 계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온 나이기에,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는 조심스레 용서라는 말도 입에 감히 올릴 수 있는 성숙함을 조금은 갖추어가는 나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이상의 극단적 언어에 매혹되었다. 그 냉혹하고 비정한 언어들이 남성적 매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고,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내다운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미성숙의 다른 이름이었다. 진정한 강함은 용서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이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상이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한 것은 어쩌면 그 극단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던 운명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나처럼 그 언어들을 부끄러워하는 시간이 왔을까.


전혜린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선택한 극단적 결말은 젊음의 순수함이었을까,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미완성이었을까.


용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젊은 시절의 나는 용서를 약함으로 여겼다. 배신당한 자의 비굴함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안다. 용서는 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나 또한 용서받아야 할 존재다. 젊은 시절의 오만함을, 미성숙함을, 상처 주었던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 용서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주 이기적인 이 밤에 천수답에서 글을 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를 재면서.


부디 평안하시길.




2012. 2. 23.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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