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10. 16. 21:21
우리 모두는 미로의 한복판에 미노타우루스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성은 그것을 키우고, 그것은 자신의 공포를 강요한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에게해의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크레타 섬, 그곳의 크노소스 궁전 지하에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그 미로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복잡한 통로들이 미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는 반인반수의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그 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포세이돈의 하얀 황소에 품었던 금기된 사랑이 낳은 기형적 존재처럼, 우리의 욕망 또한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짐승의 몸을 갖고 있고, 문명의 언어를 이해하면서도 야만의 포효를 내지른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 가장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가장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괴물의 정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키우면서 동시에 그것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것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증오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한 가닥 희미한 불빛에 의해 뚜렷하게 대비되던 세세한 윤곽과 희미한 실루엣이다. 그것은 명확하면서도 모호했고,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서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며 우리를 현혹시켰다.
그 윤곽은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고, 때로는 오래전 잃어버린 꿈의 형상이었다. 때로는 어머니의 품에서 느꼈던 따뜻함이었고, 때로는 아버지의 엄한 눈빛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모든 시간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향해 갈 미래의 예고였다.
지금 나는 분명한 현실이 될 때까지의 기다림에 목말라 있다. 이 기나긴 갈증, 반잔의 술에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무서운 갈증. 파우스트가 서재에서 밤새도록 연금술 서적들을 뒤지며 절망했을 때의 그 갈증과 다르지 않다.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을 때의 그 절망적 간절함과 다르지 않다.
이 갈증은 단순히 무언가를 얻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갈증이고, 의미에 대한 갈증이며, 완성에 대한 갈증이다. 우리는 늘 반쪽짜리로 살아간다. 반쪽짜리 사랑, 반쪽짜리 꿈, 반쪽짜리 진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맨다.
현실이 되지 않을지라도 영원히, 그래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려 올리듯, 우리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갈망을 품고 산다. 하지만 카뮈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 시지프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바위를 굴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안개가 더디게 걷히고 있다. 새벽 바다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우리의 의식 위에서도 모호함의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다. 하지만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힌다 해도 우리는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안개가, 더 짙은 안개가 우리를 둘러쌀 것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안개가 걷힌 후에 드러나는 풍경인가, 아니면 안개 자체가 진실인가. 어쩌면 우리는 안갯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명확함보다는 모호함 속에서, 확실함보다는 불확실함 속에서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나의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이것만이 확실하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이 심장의 고동이다. 생각은 의심할 수 있지만 심장박동은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 맥박은 때로 빨라지고 때로 느려진다. 사랑할 때는 빨라지고, 절망할 때는 느려진다. 희망할 때는 힘차게 뛰고, 체념할 때는 무력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것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한다.
여기서 이대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충분하다는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라는 확실한 이정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은 단순한 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의 끈이었고, 희망의 끈이었으며, 생명의 끈이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실이 있는가. 우리를 미로에서 인도해 줄 아리아드네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미로 속을 헤매야 하는 운명인가. 어쩌면 그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희망을, 의미를 우리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나중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기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논리학의 법칙인가, 아니면 체념의 변명인가. 귀납법적 사고의 함정인가, 아니면 경험주의의 한계인가.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안다. 기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어느 순간 갑자기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다리게 하는 이유다. 그것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사랑이 그렇다.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도 사랑받을 수 있다.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과거는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는 항상 가능성의 여백이 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말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창조한다. 우리가 사랑을 말하는 순간, 사랑은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희망을 말하는 순간, 희망은 현실이 된다. 우리가 꿈을 말하는 순간, 꿈은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다.
언어의 이런 창조적 힘을 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말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었고, 현실을 바꾸는 마법이었다. 신이 "빛이 있으라" 했을 때, 빛이 생겨났듯이.
'Verbum dimissum custodiat arcanum' - 잃어버린 말은 비밀을 간직한다.
이 라틴어 격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말하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큰 힘을 갖는다는 뜻일까. 침묵이 웅변보다 강하다는 동양의 지혜와 통하는 바가 있다. 노자가 말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과 같은 맥락인가.
하지만 여기서 '잃어버린 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것들인가, 아니면 말했지만 들리지 않은 것들인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고백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삼켜버린 사과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색해서 표현하지 못한 감사들.
그런 말들이 우리 안에 쌓여 비밀의 창고가 된다. 그리고 그 창고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 때로는 꿈에서, 때로는 술에 취했을 때, 때로는 병들었을 때 그 문이 살짝 열리기도 하지만.
미노타우루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포효할 뿐이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그 포효 속에 모든 비밀이 담겨 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들, 문명의 언어로는 번역될 수 없는 원초적 감정들이 그 소리 없는 절규 속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에게 바치는 공물은 무엇인가. 고대 크레타에서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을 제물로 바쳤듯이, 우리는 무엇을 바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언어, 우리의 이성, 우리의 문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공포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둘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인가. 어쩌면 가장 깊은 진실은 가장 깊은 공포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속에 우리가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필요할 때 넌 그곳에 있게 되고, 나는 단지 내 것만 가지면 된다는 것. 이것이 미노타우루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마지막 진리일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 하지만 동시에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미로를 갖고 있고, 자신만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그 괴물과 마주할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이 아닐까. 테세우스처럼 칼을 들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미노타우루스에게 바치는 공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두려움이고, 우리의 욕망이며, 우리의 한계다. 우리의 어둠이고, 우리의 그림자며, 우리의 무의식이다. 하지만 그것을 바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
Jung이 말한 그림자와의 화해,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운명애), 석가모니가 말한 고통의 수용. 모든 위대한 사상가들이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안의 어둠을 부정하지 말고, 우리 안의 괴물을 미워하지 말고, 그것들과 화해하라는 것.
Reverter의 글에서 인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진리는 이미 말해진 것이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다시 발견할 뿐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진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일까. 혹은 우리는 모두 서로의 글을 인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일까.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인용이고, 모든 말하기는 메아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조들의 말을 되풀이하고, 우리의 말은 후손들에 의해 되풀이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변형되고, 조금씩 새로워지면서.
미노타우루스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테세우스가 죽였다 해도 그것은 또 다른 형태로 부활한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후손들 안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에게 공물을 바친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고, 그것이 우리가 인간인 이유다. 우리는 괴물을 기르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괴물에 의해 길러지는 존재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미로는 감옥이 아니라 성전이고, 괴물은 악마가 아니라 신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잃는 것이 아니라 찾는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진실을. 우리의 운명을.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미로의 출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을. 괴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