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꼰대의 심술
서문
말이 줄어간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뜻일까, 아니면 세상이 복잡해진다는 뜻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말이 줄어든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들은 대개 조용하고, 때로는 쓸쓸하며, 가끔은 따뜻하다.
이 세 편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왜 말하지 않는지, 그 침묵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에 대한 작은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올해로 예순한 살이 되었다. 예순한 살이라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적어도 예순 살보다는 낫다. 하지만 예순두 살보다는 좋지 않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모든 나이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결론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은퇴라는 단어를 굳이 붙이지 않아도, 더는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투명인간이 되는 것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출근은 없지만, 여전히 아침 6시에 눈이 떠진다. 그게 버릇이기도 하고, 체념이기도 하다. 체념과 버릇의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이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오늘도 마트에 다녀왔다. 계란이 할인 중이라고 했다. 계란은 언제나 필요하다. 계란처럼 완전한 형태의 식품은 많지 않다. 타원형이면서도 완벽하고, 깨지기 쉬우면서도 견고하다. 인생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비유는 너무 진부하다.
줄이 길었고, 나는 맨 뒤에 섰다. 사람들은 대개 줄의 맨 뒤에 서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맨 뒤에서는 앞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뒤에서 누가 오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나름의 자유다.
앞에 선 두 청년이 휴대폰을 번갈아 보여주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마치 아직 세상이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았다. 내가 뒤에 선 순간, 그중 하나가 말했다.
"야, 너도 저런 스타일 될 거다?"
"뭐,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둘 다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악의가 없었다. 그저 무심한 관찰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심한 관찰이 때로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모두 너무 길고 복잡해서,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할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저 내 바람막이 점퍼 옷깃을 한번 쓸어내렸다. 구김은 펴지지 않았고, 기분도 그랬다.
줄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는 갑자기 계란이 필요 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계란의 필요성이라는 것도 결국 기분의 문제였던 것이다. 슬그머니 줄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도 뭐, 계란은 다음 주에도 할인할 테니까.
내 차는 다찌다. 2004년식 경유 모델. 조금만 속도를 내면 웅― 하고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나보다 먼저 늙었다. 기계도 늙는다는 것을 나는 이 차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기계가 늙는 소리와 사람이 늙는 소리는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도.
가끔 고속도로에서 진한 색의 SUV가 내 옆을 휙 지나간다. 신호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나는 그저 추월해야 할 장애물 중 하나일 뿐이다. 나도 한때는 그런 차를 몰았고, 그런 식으로 다른 차들을 추월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상상력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그럴 때면 나는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빠르다. 하지만 나는 오래간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사실 그거면 된 거다. 인생에서 필요한 것의 대부분은 '사실 그거면 된 거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딸이 집에 왔다. 남편이 출장이라 혼자 잔다고 했다. 딸은 서른여섯 살이고, 결혼한 지 십 년이 되었다. 그 십 년 동안 그녀는 조금씩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모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란다.
냉장고를 열고 닫고, 화분을 만지작거리고, 뭔가를 말하려다 마는 기색이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사람은 변하지만, 어떤 습관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린 함께 저녁을 먹었고, 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뉴스를 봤다. TV 볼륨은 작았고, 딸은 더 조용했다. 조용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나는 나이 들어서야 깨달았다. 편안한 조용함, 불안한 조용함, 그리고 뭔가를 기다리는 조용함.
식탁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중, 나는 무심히 말했다. "며칠 전 마트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앞에 선 애들이 그러더라. '야, 너도 저렇게 될 거냐.' 그냥 나와버렸지."
딸은 조용히 창밖을 봤다.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창문 위로 또각또각 물방울이 흘렀다. 비 오는 소리는 언제나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특별히 생각할 것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잠시 후, 딸이 말했다. "아빠도 젊었을 땐 그런 말 들었어?"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니. 우리는 그냥 얻어맞았지. 말 같은 건 없었어."
딸은 웃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 말이 어딘가에 가라앉았다. 말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때로는 말들이 정말로 가라앉는다. 깊은 물속으로,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곳으로.
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가장 긴 대화였다. 때로는 짧은 대화가 긴 대화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잠이 오지 않을 뿐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이 들어서 배우는 기술 중 하나다.
부엌에 나와 맥주를 꺼냈다. 개는 나를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개에게는 인간의 불면증이 별로 흥미로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내는 자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TV를 켜지 않았다. 조명을 켜지 않은 거실은 거의 내 얼굴만큼이나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 맥주 한 캔을 따서 천천히 마셨다. 어둠 속에서 마시는 맥주는 밝은 곳에서 마시는 맥주와 맛이 다르다. 더 쓰고, 더 진하다. 하지만 더 정직하기도 하다.
꼰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서서히 숨 막히게는 한다. 말하지 않음으로 방어하려 했고, 그게 오히려 나를 지워갔다. 그게 심술이라면, 참 조용한 심술이다.
나는 맥주를 다 마시고, 조용히 빈 캔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그것도 내 몫의 방식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점이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도 아마 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침 6시에 눈을 뜰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확실한 일들이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것들을 찾는 것, 그것도 나이 들어서 배우는 기술 중 하나다.
"심술이라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의 한 형태일 수 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직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