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꼰대는 왜 침묵하는가
나는 이제 말이 줄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 내 말을 끊었을 때부터, 혹은, 누군가 내 말을 듣는 척하면서 딴청을 부릴 때부터. 침묵이라는 것은 대개 서서히 찾아온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버지는 원래 말씀이 없으셔." 그건 칭찬이 아니다. 관찰이고, 조금은 방치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 반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을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해석이 필요하고, 해석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피로를 만든다. 이 나이엔 피로가 가장 먼저 찾아오는 적이다.
딸이 손자를 데리고 놀러 왔다. 아이는 여덟 살. 말이 빠르고, 질문이 많고, 금세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요즘 아이들은 모두 그렇다. 집중력이 짧다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어쩌면 집중할 대상이 너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왜 맨날 말 안 해?" 그 질문이 귀엽긴 했다. 아이들의 질문은 대개 핵심을 찌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냐?"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과자를 씹으며 대답했다. "아니.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웃었다. 웃긴 말인데 웃기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를 탓할 순 없다. 세상이 너무 커졌고,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내는 예전보다 더 말을 많이 한다. 드라마 속 대사를 따라 하듯, SNS에서 본 걸 읊조리듯.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경청이라기보다 노력 없는 존중 같은 것이다.
"당신은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말했다. "그건 나도 그래. 내 생각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 말은 농담이었고, 조금은 진심이었다.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는 것도 때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가끔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만. 이름을 누르고, 벨이 울리기 전에 끊는다. 목소리를 들을 용기는 없어졌다.
그 사람도 아마 비슷할 거라 믿는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충분하다.
실은, 말하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끔은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억은 말보다 더 오래 남는다.
누군가 내게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피곤해서요."
물론 그렇게까지 묻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제는 '괜찮아 보이는 사람'으로 그저 분류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지 않는 건 심술이 아니다. 그냥,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들이 조금씩 늘어났을 뿐이다. 그게 나의 가장 오래된 연애고, 유일한 방어고, 아직 남은 품위다.
침묵이라는 것은 때로는 가장 정확한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위로받는다.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말하기 방식이다. 다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이 세 편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침묵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침묵은 때로는 체념이고, 때로는 선택이며, 때로는 마지막 남은 예의이기도 하다.
말이 넘쳐나는 시대에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조금 역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역설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 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라는 것, 그리고 그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꼰대라는 말로 쉽게 분류되어 버리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이유와 사연이 있다.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꼰대는 말이 없다 | 소설선집 |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