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청산일기〉Part.1

Part.1 – 파란빛의 우주를 던지고

〈우주의 청산일기〉

Part.1 – 파란빛의 우주를 던지고 by 망치든건축가


6월 25일, 나는 이사를 간다.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마다 나는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을 정리하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각각의 음반에는 시간의 먼지가 쌓여 있고, 그 먼지를 털어내는 순간 갑자기 기억들이 소리를 내며 흘러나온다. 단순한 주소 변경이 아니다. 익숙했던 생활의 선을 지우고, 새로운 평면 위에 다시 삶을 그려넣는 일이다.


누군가는 이런 걸 '인생의 구조를 다시 짜는 일'이라 부르더라. 내게는 꽤 정확한 표현이었다. 건축을 했던 이의 입장에선 인생이란 늘 설계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때로는 청사진처럼 선명하게, 때로는 스케치처럼 흐릿하게 그려지는.


이사라는 단어는 늘 '떠남'으로 들렸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는 물리적으로 이동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그 무너진 자리엔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것들이 흩어진다. 마치 오래된 서점의 책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새벽 네 시, 나는 커피를 끓이며 생각했다. 왜 이런 결정들은 항상 새벽에 내려지는 걸까. 어쩌면 밤의 정적 속에서만 우리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오늘, 나는 작은 우주 하나를 청산했다.


그건 내 계좌 속에 숨어 있던 세계였다. 신용까지 끌어다 모았던 주식들. 한때는 가능성이라 불렀고, 어느 날은 회복이라 불렀으며, 결국엔 버티기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것들. 그 숫자들은 내게 단순한 재정적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희망의 언어였고, 때로는 절망의 문법이었다.


그래프는 대부분 파란색이다. 차가운 바다색. 겨울 오후 네 시쯤의 하늘색. 기대하던 빨간 새싹은 피지 못했고, 손끝으로 눌렀던 수많은 '확인' 버튼들이 이젠 전부 '정리' 버튼이 되었다.


나는 그 파란빛을 지켜보며 종목 하나를 매도할 때마다 마치 내 안의 어떤 감정 구조가 한 겹씩 무너지는 걸 느꼈다. 조심스럽게 쌓아올렸던 나만의 논리, 한때는 설계도 같았던 그 믿음의 구조물. 그것들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허물어져 내렸다.


마치 오래된 샌드캐슬이 파도에 씻겨나가는 것처럼. 아름답고, 슬프고, 동시에 어쩐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은 말없이, 가끔은 작은 질문으로, 그리고 가끔은 짧은 권유로. 그녀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말을 건네는 재능.


"이사자금에 보태는 게 어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아침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비를 바라보면서. 무심한 듯 조용한 말투였지만 그 안엔 날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묵은 신뢰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준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던져야 한다는 걸. 더는 이 숫자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내게서 떠났고, 나만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건 단순한 매도가 아니라 삶의 한 챕터를 내 손으로 닫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단어는 참 이상하다. 우리는 모두 실패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데, 왜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자신만 혼자인 것 같을까. 마치 실패라는 감정이 전염병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결국, 나는 마우스를 클릭했다. 차트를 끌어내리고, 주문을 넣고, 거래를 확정지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내 안에선 조용한 폭음이 울렸다. 마치 빈 강당에서 피아노 한 대가 혼자 연주되는 소리 같았다.


그건 마치 오래 키우던 식물을 그녀의 말 한마디에 창밖으로 내던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는 억지로 시킨 게 아니다. 그녀는 늘 그런 식이다. 무언가를 말할 땐 부드럽지만,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깊이 남는다. 그녀의 말들은 마치 좋은 책의 문장처럼, 한 번 읽고 나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정리된 종목들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붙들고 있었을까. 이건 미련일까, 욕심일까, 아니면 그냥... 겁이었을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혹시 다시 오르면 어쩌지.' '아직 끝난 건 아닐 수도 있잖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조금만 더"는 마치 늘어지는 고무줄 같았다. 몇 달이 지나도, 몇 해가 지나도 계속 "조금만"이라고 속삭이며 나를 붙들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하지만 때로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을 품는 첫걸음인 것을 우리는 왜 잊을까.


계좌를 다시 들여다봤다. 숫자도, 색도, 감정도 이제는 예전과 달랐다. 아쉽고, 허무하고, 동시에 후련했다. 마치 오래 아팠던 이가 마침내 뽑힌 후의 기분 같았다.


계좌는 여전히 파랗다. 하지만 이제는 그 파란빛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차가운 실패의 색이 아니라, 한때는 바다였던 색일지도 모른다. 깊고 넓은, 가능성으로 가득했던 바다. 지금은 비록 얕은 웅덩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바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물.


폭풍이 지나간 바다는 시간이 지나면 고요해진다. 때론 투명해지기도 하고, 때론 다시 큰 파도를 준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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