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청산일기〉Part.2

Part.2 – 짐보다 마음이 먼저 떠났다

〈우주의 청산일기〉

Part.2 – 짐보다 마음이 먼저 떠났다 by 망치든건축가


가구는 그대로였다. 소파는 늘 앉던 자리에 있었고, 식탁도, 책장도,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벽에 걸린 액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화분은 매일 물을 주지 않아도 여전히 초록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한때 익숙했던 것들이 하루 아침에 껍데기처럼 변해 있었다.


이삿짐은 아직 싸지 않았지만, 삶의 감각은 이미 어딘가로 빠져나가 있었다. 남은 건 껍데기뿐이었다. 몸만 이 집에 남아 있고, 마음은 이미 어딘가 다른 평면 위에 조용히 도면을 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건축에서는 이런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건물도 마찬가지니까. 철거 날짜가 정해지면 그 순간부터 건물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안에서 생활하지만, 건물의 영혼은 이미 어딘가로 떠나버린다. 마치 죽음이 예고된 환자의 몸에서 생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처럼.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거실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모든 물건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것들과 함께한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친숙함조차 어딘지 서먹하게 느껴졌다.


*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낀 건 청소기를 돌리지 않은 날이었다.


평소라면 일주일에 두 번은 돌렸을 것이다. 러그 위의 먼지, 소파 틈새에 끼인 부스러기들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그것조차 더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쌓여가는 먼지가 보여도 그걸 치우고 싶은 마음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미 떠난 집의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의미 없는 행위 같았다.


그다음은 식료품이었다. 마트를 지나치며 문득 생각했다. '이걸 굳이 지금 사야 하나?' 평소라면 일주일치 장을 보고, 냉장고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치 우유, 이틀치 빵만 사게 되었다. 그렇게,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우지 않기로 했다.


냉장고 속 반찬은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묵은 소스와 잊힌 양념통들이 채웠다. 문을 열 때마다 텅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녀도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화장대를 깔끔하게 정리했을 텐데, 요즘엔 화장품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도 예전처럼 정성스럽게 개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이 공간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


짐을 싸야 했다. 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박스를 펼쳐 놓고도 그 안에 무엇부터 넣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날이 있었다. 마치 빈 캔버스 앞에서 첫 붓질을 망설이는 화가처럼.


눈앞에 펼쳐진 물건들은 그저 '짐'이 아니라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이었다. 함께 쓰던 그릇에는 수많은 식사의 기억이 담겨 있었고, 서랍 속의 반쯤 닳은 볼펜에는 메모했던 생각들이 스며 있었다. 같은 소리로 울리는 알람시계는 우리가 함께 일어났던 모든 아침을 기억하고 있었다.


삶의 조각들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 더 이상 감정이 머물지 않았다. 마치 박물관의 전시품을 보는 것 같았다. 의미는 있지만 거리가 있는, 그런 느낌.


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한참을 바라봤다. 페이지 곳곳에 연필로 그어놓은 밑줄들, 모서리가 접힌 책갈피들. 한때는 소중했던 것들이 이제는 그저 무게만 있는 물건으로 느껴졌다.


"여기, 정이 들긴 했었나?"


그녀가 말했다. 서랍을 덮으며 나를 힐끔 보더니, 천천히 말끝을 떨궜다. 그 말엔 어떤 의심도, 후회도 없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질문이 오래 남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기대 놓은 화분을 바라봤다. 한때는 매일 물을 주었고, 가지가 처지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곤 했던 녀석. 요즘엔 물 주는 것도 까먹은 채 그저 잎이 시들지 않았는지만 확인하고 있었다.


그 화분을 처음 샀던 날이 기억났다. 동네 꽃집에서 그녀가 "이거 어때?"라고 물었고,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 집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분이 자라는 만큼 우리의 생활도 뿌리를 내릴 거라고 믿었다.


"응. 정은 들었던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웃지도 않았다. 다만 조용히 다음 박스를 꺼내 접었다.


그녀의 손끝이 박스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감정을 숨기고, 미소로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을까.


*


우리는 어느새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잠시 대기 중인 사람들'처럼 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봐도 집중되지 않았고, 주방에 불을 켜도 요리를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생활의 구조가 무너지고 있었다. 마치 서서히 해체되고 있는 건물의 내부 같았다.


욕실의 수건 걸이에 걸린 두 장의 수건, 신발장에 늘어선 신발들,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와 마트 영수증들. 모두 그대로였지만 그 안엔 우리라는 감정이 빠져나가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공간 안에 있었지만 그 공간에 더 이상 '살고 있다'는 감각은 없었다. 마치 호텔 방에 머무는 여행자처럼, 모든 것이 임시적으로 느껴졌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앞으로 나갔다. 금연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그날은 왜인지 담배가 필요했다. 요즘엔 베란다에서도 피울 수 없어서 이렇게 밖으로 나와야 했다.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감정도 저렇게 조용히 흩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창문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같이 산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여전히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작은 조명을 켜고, 노트북을 펼쳤다. 나는 식탁 옆 박스에 한 권, 한 권 책을 넣다 말다를 반복했다.


"이거, 새집에도 가져갈 거야?"


그녀가 물었다. 손에 든 건 우리가 함께 읽었던 소설책이었다. 페이지 여기저기에 우리 둘의 메모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글씨는 둥글고 작았고, 내 글씨는 각지고 컸다.


나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두고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왜 눈이 뜨거워지는지는 잘 몰랐다. 책보다 먼저, 마음이 이 집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그 동작이 무언가를 끝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무언가를 정리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단순히 이사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서의 우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거실 한쪽 구석에 쌓인 박스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박스들 안에는 우리의 물건들이 들어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간도 들어있다. 함께 웃었던 순간들, 작은 다툼들, 조용한 일상들. 그 모든 것들이 골판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집에서 그 박스들을 다시 풀 때, 우리는 어떤 기분일까. 여기서의 기억들을 새로운 공간에 배치할 때, 그 기억들은 여전히 같은 의미를 가질까.


*


누군가는 말했다. 이사라는 건 물건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옮기는 일이라고.


그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우리는 아직 이 집에 살고 있었지만, 이미 이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짐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그보다 먼저 떠난 건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제 조금씩, 새로운 평면 위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보지 못한 창문, 아직 채우지 못한 방,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추억들을 향해서.


건축을 아는 이는 안다. 모든 공간에는 생명이 있다는 걸.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공간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이 떠날 때가 되면, 공간도 조용히 숨을 거두어들인다.


이 집도 이제 조용히 숨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우리가 떠날 준비를 하는 만큼, 이 집도 우리를 보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새로운 집에서의 첫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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