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션이 사라진 날의 짧지 않은 이야기
# 불이 꺼진 자리를 바라보며
by 망치든건축가
그 자리는, 이상할 만큼 멀끔하게 비어 있었다.
싱크대 상판 한가운데, 전 주인이 인덕션을 떼어간 흔적이 조용히 눌려 있었다. 560×480mm.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였다. 숫자 하나만이 남겨진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그 빈 공간 안에서 어떤 완성을 꿈꾸고 있었다.
이사라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남의 삶이 비워낸 자리에 내 삶을 끼워 맞추는 과정. 전 주인이 어떤 이유로 인덕션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떠나면서 가져간 그 사각형의 공백이 이제는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축을 했던 입장에서 이런 순간이 걸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솔찍이 당혹스러웠다. 빌트인에서 그걸 뜯어가? 식세기두 있었음 뜯어갔을 양반. ㅡㅡ)
도면 위의 빈 공간을 채우는 일, 기능과 미학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에서 그 선택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일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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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인덕션을 다시 설치할까 했다. 요즘은 다들 그러니까.
실용적이고, 안전하고, 청소도 쉽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딱 맞게 설계되어 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인덕션의 붉은 고리는 너무 조용했다. 뜨겁기만 했고, 왠지 정이 없었다. 마치 감정 없는 기계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효율적이지만 차가운, 그런 종류의 완벽함.
나는 발갛게 올라오는 푸르스름한 가스 불꽃이 좋았다. 불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줬다. 바람에 흔들리고, 가스 밸브를 돌리는 손끝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불확실성과 생동감.
어쩌면 이건 합리성과 감성 사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물론 그 결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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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을 채우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560×480이라는 치수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제품들이 미묘하게 맞지 않았다. 너무너무 작거나, 너무 작거나. 4cm, 5cm의 차이가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
(마음에 차는건, 560×430)
건축에서는 '허용 오차'라는 개념이 있다. 완벽한 정확성보다는 실용적인 범위 내에서의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공간에 무언가를 끼워 넣을 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정확히 맞거나, 아니거나.
나는 며칠 동안 그 빈 자리를 바라봤다. 아침에 커피를 끓이려 할 때, 저녁에 간단한 요리를 하려 할 때, 그 공백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마치 퍼즐에서 마지막 조각만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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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기준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기능에 집중했다. 화력, 안전장치, 에너지 효율.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것들이 중요해졌다. 디자인, 질감, 내가 매일 마주할 때의 기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게 될 물건이라면, 그 자체로도 작은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조건을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 내 삶의 리듬과 어울리는 무언가.
나는 검색창에서 벗어나 실제 매장으로 향했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만져보는 것은 달랐다. 손끝으로 느끼는 재질감, 버튼을 누를 때의 감촉, 불꽃이 올라올 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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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조용한 선택을 했다.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그저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의 제품. 블랙 컬러의 세라믹 코팅이 되어 있어서 기름때도 쉽게 닦이고, 스크래치에도 강했다. 무엇보다 그 제품은 말이 없었다.
화려한 기능을 자랑하지도, 눈에 띄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조용함 안에, 기름이 튀고 국이 끓는 날도, 내 삶을 묵묵히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치하는 날, 나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 기사님이 가스 연결을 점검하고, 안전장치를 테스트하는 모습. 30분 남짓한 작업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빈 공간이 천천히 채워지는 걸 보는 것은 묘한 만족감을 줬다.
첫 번째 불꽃이 올라올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선택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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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은 다시 그 자리에 놓였다.
가끔은 계란을 굽고, 가끔은 아무것도 놓이지 않더라도, 그 자리는 정확히 나를 위한 공간이다. 560×480이라는 숫자는 이제 더 이상 제약이 아니라, 나만의 영역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끓일 때, 그 파란 불꽃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고. 효율성보다는 감각을, 편의성보다는 경험을 택한 것이라고.
물이 천천히 끓는 소리, 그 위로 오르는 김, 불꽃이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 인덕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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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순히 가스레인지를 고른 이야기가 아니다.
빈 공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내 방식을 찾을 것인가. 560×480이라는 치수 안에서 나에게 맞는 불꽃, 나에게 맞는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
누군가는 인덕션을 쓸 것이다. 누군가는 더 고급스러운 것을 고를 테고, 어떤 이는 가장 저렴한 걸 택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선택이 틀리지 않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선택이 자신의 삶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
나는 매일의 리듬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급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천천한 적응을, 첨단 기술보다는 익숙한 감각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선택을 한 이유다.
건축을 아는 이라면 안다.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기능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의 리듬과 성향, 그리고 작은 취향들이 모여야 비로소 '집다운 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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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 위에서 아주 천천히, 내 하루를 데우고 있다. 어떤 날은 복잡한 요리를, 어떤 날은 간단한 라면을. 그 모든 순간들이 이 작은 불꽃과 함께한다.
전 주인이 남기고 간 빈 자리는 이제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 그의 삶의 흔적은 지워지고, 내 일상의 리듬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것이 이사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른다.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공간을 내 방식으로 다시 정의하는 것.
가끔 그 파란 불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삶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비워둔 자리에 내 방식을 채워넣고, 작은 선택들을 통해 조금씩 나다워지는 과정.
560×480, 그 작은 사각형 안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우리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의 방식을 찾아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그저 내게 맞는 온도로 천천히 타오르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