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청산일기〉Part.3

Part.3 – 냉장고를 비우는 일

# 〈우주의 청산일기〉

Part.3 – 냉장고를 비우는 일

by 망치든건축가


그제였던가, 아니면 글피였나. 요 며칠의 시간은 빛살처럼 부서지며 지나갔다.


이사 준비로 바쁜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박스를 접고, 물건을 분류하고,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는 일. 그런 와중에 문득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사를 앞두고 냉장고를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문득, 이 작은 박스 안에 지난 계절들이 고이고 고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입장에선 냉장고도 하나의 작은 창고 같은 것이었다. 필요에 따라 채우고, 시간이 지나면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순환의 공간. 하지만 막상 비우려고 하니, 그 안에 담긴 것이 단순히 음식물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맨 위 칸부터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묵은 고추장 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1년도 넘게 쓰고 있던 것 같았다. 처음 샀을 때는 진한 빨간색이었는데, 이제는 표면이 바싹 말라서 갈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도 안쪽은 아직 싱싱할 것 같았지만, 새집에 가져가기에는 애매한 상태였다.


반쯤 마신 맥주캔들이 문쪽에 줄지어 서 있었다. 언제 마신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혼자 저녁을 먹으며 하나씩 따놓고는, 끝까지 마시지 못했던 것들일 것이다. 탄산은 이미 다 빠져서 미지근한 액체가 되어 있을 터였다.


유통기한이 애매하게 지난 치즈 조각도 있었다. 2주 전까지는 괜찮다고 써 있었는데, 냄새를 맡아보니 아직 먹을 만했다. 하지만 이사짐에 포함시키기에는 뭔가 찜찜했다.


그 사이엔 혼자 밥을 먹던 날의 기억, 그녀와 함께였던 주말의 조리 흔적도 얇게 얼어붙은 채로 남아 있었다.


냉동실에는 더 오래된 것들이 잠들어 있었다. 언제 얼렸는지 모를 고기 덩어리, 반찬을 소분해서 얼려둔 것들, 그리고 한 번도 요리하지 않은 채로 냉동실 깊숙이 밀려들어간 재료들.


*


하나씩 꺼내면서 나는 기억들을 따라갔다.


이 김치는 그녀가 친정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담그신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통을 들고 왔던 날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너무 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딱 좋은 맛으로 익어갔었다. 지금은 거의 다 떨어져서 국물만 조금 남아 있었다.


냉동실 구석에서 발견한 만두는 설날에 같이 빚었던 것들이었다. 그날 우리는 오후 내내 부엌에서 만두를 빚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많이 만든 바람에 한 달 넘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이제 마지막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야채칸에는 시들어가는 상추와 무가 있었다. 일주일 전에 장을 볼 때 싱싱해 보여서 샀던 것들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요리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잎사귀들이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정리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꺼내지는 기분이었다.


버릴 것은 쓰레기통으로, 아직 먹을 수 있는 것은 따로 모아서 이삿날 전까지 소비하기로 했다. 새집으로 가져갈 것은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분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이 단순히 물건을 나누는 일만은 아니었다. 쓸모를 다한 감정과 기한이 지난 기대들도 함께 버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마음의 짐들, 언젠가 쓸 거라고 생각하며 붙들고 있던 감정의 잔재들.


고추장을 버리면서는 혼자 끓여 먹던 라면의 쓸쓸함을 함께 버렸다. 상한 야채를 정리하면서는 계획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요리에 대한 아쉬움을 놓아보냈다. 얼어붙은 반찬들을 덜어내면서는 과거의 어떤 안락함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씩 덜어냈다.


*


냉장고는 점점 텅 비어갔다.


비워진 선반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나는 조용한 만족감을 느꼈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판 위로 냉장고의 LED 조명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공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선 무언가를 비워야 하니까. 새로운 집, 새로운 냉장고에 새로운 음식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의 비움이 필요했다.


이사라는 것은 결국 이런 작업들의 연속이었다. 옷장을 비우고, 책장을 정리하고, 서랍 속 잡동사니들을 분류하는 일. 그리고 냉장고를 비우는 일. 각각의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건축에서 철거 작업이 그렇듯, 새로운 것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물을 해체해야 한다. 내 삶의 철거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패턴들, 익숙했던 루틴들을 조심스럽게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만드는 것.


*


마지막으로 냉장고 안을 깨끗하게 닦았다.


베이킹소다를 푼 물로 구석구석 닦아내고, 물기를 완전히 제거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둔 채로 하루 동안 말렸다. 다시 사용하기 전까지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무리라고.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완전히 정리하고 다음 사람에게 깨끗하게 넘겨주는 것. 이 공간은 바로 채워질것이다. 나가고 연계되어, 바로 들어오는.


건축하는 이로서 늘 생각해왔던 '마감'의 개념이 이사에서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


이건 그냥 정리가 아니었다. 이건, 나의 우주를 다시 설계하는 첫 작업이었다.


Part 1에서 주식을 정리했을 때는 숫자로 된 자산을 현금화하는 일이었다.

Part 2에서 마음이 먼저 떠났을 때는 감정적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번 Part 3에서는 가장 일상적이고 물리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


냉장고를 비우는 일은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먹고, 마시고, 저장하고, 소비하는 일상의 순환을 한 번 완전히 멈추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


새집에서도 이 냉장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새로운 음식들이 채워질 것이고,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갈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장을 보고,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고, 함께 정리하는 새로운 일상의 리듬들.


그런 미래를 위해서, 나는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했다. 냉장고를 비우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끝과 시작 사이의 경계에서 치르는 조용한 의례.


*


며칠 후 이사짐센터 직원들이 냉장고를 새집으로 옮겨갔다.


텅 빈 냉장고가 트럭에 실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기분이었다. 4년 동안 내 일상을 묵묵히 지켜주었던 하얀 박스가 이제는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내 삶을 담게 될 것이다.


새집에 도착한 냉장고는 처음엔 낯설어 보였다. 다른 공간, 다른 조명, 다른 배치. 하지만 전원을 켜고 하루 정도 지나니 익숙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음식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공간을 완전히 비워서 정리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새로운 기억들로 천천히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라는 거대 프로젝트에서 냉장고를 비우는 일은 작은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일들이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든다. 우주를 청산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들의 연속이다. 하나씩, 천천히, 정성스럽게.


그리고 이제 나는 새로운 우주를 설계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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