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여정: 한 편의 시에서 소설까지

#『귀환하지 않는 자들』

by leehyojoon ARCH

※ 창작 과정에 대하여, 그리고 창작론에 대한 철학적 사유입니다.



창작의 여정: 한 편의 시에서 소설까지


#느낌의 정제를 위한 변주들



1단계: 원작 한글시 → 영문시 (첫 번째 번역)

2025년, 서울


원작 《그 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처음 영어로 옮길 때, 나는 충실한 번역자가 되려 했다.

16음절의 운율을 보존하려 했고, "묻었다. 다시."의 건조한 반복을 그대로 살리려 했다.


그때 전작 『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들』에 등장하는 사토의 말이 떠올랐다.

체호프를 번역하던 그가 했던 말:

"번역은 일종의 망명이에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떠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망명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원작의 집에 머물고 싶었다.


Week One. She left behind a single note: "I couldn't bear all that this week held." Her neck was hung. Her skirt was torn. They buried her. Her name. Her death.


하지만 번역하면서 깨달았다.

한국어의 압축적 잔혹함이 영어에서는 다른 질감을 갖는다는 것을.

더 설명적이 되고, 더 서사적이 된다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번역이란 원작을 죽이는 일인가,
되살리는 일인가?"



사토가 말했듯이, 번역은 망명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떠날 용기가 없었다.



2단계: 영문시 → 영문시 (재창작)

2025년, 런던


첫 번째 영어 번역이 나를 괴롭혔다.

너무 한국어에 종속되어 있었다.

영어로 읽는 독자들에게는 어색하고 인위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진짜 망명을 시작하기로 했다.

원작을 잊기로 했다.

완전히 새로운 영어 시를 쓰기로 했다.


사토가 한국어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흥미로워요. 일본어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무게가 있어요."

영어에도 다른 무게가 있었다.

한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The ocean cast them out. Signals reached no shore. Food was gone by day five. Five pairs of eyes, one woman alone.


"The ocean cast them out." 바다가 그들을 '내쫓았다'. 한국어의 '버렸다'보다 더 의도적이고 잔혹하다.

"Her neck swayed." 목이 '흔들렸다'. 'hung'보다 더 시적이고, 더 바람의 움직임 같다.

"Her flesh had not yet softened." '부패'를 '부드러움'으로. 영어만의 완곡어법적 섬뜩함.


이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원작을 배신해야만 진정한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망명은 배신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3단계: 영문시 → 에세이 (성찰의 언어)

2025년, 뉴욕


두 개의 영어 시를 놓고 보니, 하나의 에세이가 필요했다. 이 변화의 과정을 설명해야 했다. 무엇이 잃어졌고, 무엇이 얻어졌는지.


언어는 어디서 죽는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한 편의 시와 함께 살았다. 《What Happened on That Island》...


에세이를 쓰면서, 시는 더 이상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질문의 재료가 되었다.


"Her neck swayed."라는 한 줄이 왜 "Her neck was hung."보다 더 충격적인가?

'swayed'라는 단어 선택이 어떻게 독자를 시인의 공범으로 만드는가?


에세이는 시보다 더 위험했다. 시는 침묵할 권리가 있지만, 에세이는 해명해야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모순.



4단계: 에세이 → 소설 (서사의 확장)

2025년, 파리


에세이를 다 쓰고 나니, 새로운 갈증이 생겼다. 그 섬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시와 에세이가 남긴 여백을 채우고 싶었다.


소설 《귀환하지 않는 자들》의 프롤로그: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는 기억을 씻어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억을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을. 물이 가진 이중적 성질처럼, 정화와 회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기억은 증언이 아니며, 자백은 더더욱 아니다."


소설의 최종 메시지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귀환하지 않는 자들'이 될 수 있으며, 그 경계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깝고 얇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시에서는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면, 소설에서는 "그는 어떻게 돌아왔는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더 정확히는, "그가 말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어야 했다.


시의 "다섯의 몸이 하나의 시신 위로 쏟아졌다"는 한 줄이, 소설에서는 200페이지에 걸친 심리적 해부가 되었다.


에세이의 "우리는 정말 귀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소설에서는 실제 인물의 일상으로 구현되었다.


그는 "돌아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증언이 될 수 없고, 그의 자백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소설은 바로 그 틈새에서 시작된다.



변주의 의미: 느낌의 정제 과정


이 네 단계를 거치면서, 나는 "느낌의 정제"*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는 느낌을 압축한다. 16음절 안에 모든 것을 쑤셔 넣는다.

번역은 느낌을 변환한다. 한국어의 절망을 영어의 절망으로.

에세이는 느낌을 해부한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분석한다.

소설은 느낌을 확산한다. 독자가 그 느낌 속에서 살도록 만든다.



최종 발견: 원작의 배신과 충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에서 가장 멀어졌을 때 원작에 가장 가까워졌다.


『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들』의 사토가 체호프를 번역하며 느꼈을 그 감정을 이제 이해한다.

"번역은 일종의 망명"*이라는 그의 말이 이제야 완전히 이해된다.


우리는 언어의 고향을 떠나야만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한국어라는 집을 떠나 영어라는 낯선 땅에서, 비로소 원작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글시: "피는 씻겼지만 죄는 묻히지 않았다."

영문시: "The blood washed away, but the sin would not be buried."

영문시(재창작): "The blood has washed clean. The guilt remains buried deep."

에세이: "피는 씻을 수 있다. 하지만 죄책감은 땅속에 남는다."

소설: 한 인물이 샤워를 하면서 손을 닦는 장면. 200번째 비누칠.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붉은 얼룩.


같은 진실, 다른 형태들. 모든 변주가 결국 같은 침묵으로 수렴한다.



결론:

창작이란 번역이다



원작 시에서 소설까지의 여정은 하나의 거대한 번역 과정이었다.


언어에서 언어로, 장르에서 장르로, 침묵에서 침묵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깨달았다. 가장 좋은 번역은 원작을 죽이고 다시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사토가 말했듯이, 번역은 망명이다. 하지만 그 망명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느낌은 정제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섬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다만 다른 언어로, 다른 형태로 말해질 뿐이다.



번역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만지며 말한다:

"이것이 내가 찾은 새로운 고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