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에 대한 소고.
여느 날 오전, 나는 침실에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아침 8시 13분. 내가 이런 세세한 시간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침대 옆 디지털 시계의 붉은 숫자들이 셔츠의 하얀 단추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창밖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젯밤 꿈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까마귀 소리만큼은 선명했다. 어쩌면 꿈이 아니라 실제로 들었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면으로 된 하얀 셔츠였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옥스퍼드 셔츠로, 3년 전 그녀가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지금도 옆에 있는 그녀, 셔츠도 여전히* 잘 입고 있다. 물건은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는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고 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15년 넘게 셔츠를 입어왔으니 이런 건 의식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치 자전거 타기처럼.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마지막 단추까지 다 끼우고 나서였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어긋나 있었다. 마치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기타를 보는 것 같았다. 음은 나지만 뭔가 틀린, 그런 느낌.
나는 별다른 감정 없이 모든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더 주의 깊게.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첫 단추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정확히 끼우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한 구멍씩 어긋나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전체적인 모습을 결정한다.
나는 커피를 끓이며 로렌츠의 기러기 이야기를 떠올렸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들이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여기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야기. '각인'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기러기들은 자신이 수염난 과학자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심하지도 않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일까. 우리가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어린 시절의 무의식적 각인에 의한 것일까.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자주 말씀하셨다. "천천히 해도 괜찮다." 서두르지 말라고, 실수해도 다시 하면 된다고. 그런 말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급하지 않은 성격, 완벽주의가 아닌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하지만 세상은 때로 다른 메시지를 보낸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더 경쟁적으로. 그런 목소리들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TV에서, 인터넷에서, 지하철 광고에서. 그리고 때로는 내 안에서도.
두 번째로 단추를 끼우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틀려도 괜찮다.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점심을 먹고 난 후, 나는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마치 어린 시절 여름밤 할머니 댁 마당에서 본 반딧불처럼, 깜빡이며 사라져가는 그런 느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창밖으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초등학생들인 것 같았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다. 아직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 아닌가? "빨리 와!" "기다려!" 그런 소리들. 나는 문득 중학교 때 운동회를 떠올렸다.
백 미터 달리기였다. 나는 4레인이었고, 옆에는 반에서 가장 빠른 아이가 서 있었다. 출발 신호가 울렸을 때 나는 0.3초 늦게 출발했다.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당연히 꼴찌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별로 속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괜찮다, 다음에는 더 잘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하나의 각인이었을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좋은 신발을 신고, 어떤 사람은 낡은 신발을 신는다. 어떤 사람은 코치가 있고, 어떤 사람은 혼자 연습한다. 어떤 사람은 영양가 있는 아침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굶고 온다.
그런 차이들이 결과를 좌우한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조건의 차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늦게 출발해도 끝까지 뛸 수 있다. 꼴찌를 해도 완주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
나는 내 고양이 라이언을 바라봤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치즈테비 고양이였다. 작년 12월 지인의 구조로 데려온 녀석이다. 그때가 생후 3개월령이었으니까, 그해 9월쯤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작고 서먹했지만, 지금은 제법 커서 소파를 차지하고 있다.
고양이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 따뜻한 소파, 배부른 상태, 안전한 집.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고양이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며.
오후 3시 27분, 나는 다시 셔츠를 바라봤다. 모든 단추가 제자리에 있었다. 처음에는 틀렸지만 결국 제대로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아름답고 사라져가는 음악처럼.
나는 라이언의 털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눈을 뜨지 않고 가르랑거렸다. 그 진동이 내 손끝으로 전해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살아있는 진동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시작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괜찮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올바른 첫 단추가 되어주는 것.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던가.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말이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셔츠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또 첫 단추를 잘못 끼운다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시작할 것이다. 몇 번이고, 제대로 될 때까지.
창밖의 아이들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마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오늘의 이 순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