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청산일기〉Part.4

Part.4 – 비우고 나면, 채워야 하니까

〈우주의 청산일기〉

Part.4 – 비우고 나면, 채워야 하니까 by 망치든건축가



비우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작은 냉장고 하나에 그렇게 많은 계절이 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묵은 고추장부터 시작해서 얼어붙은 만두, 시들어가는 야채들까지. 하나씩 꺼낼 때마다 함께 딸려 나오는 기억들의 무게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하지만 비우고 나니, 오히려 막막해졌다.


텅 빈 서랍, 맨살을 드러낸 선반 위에 이제는 무엇을 넣어야 하지? 나는 그런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마치 백지 위에 첫 줄을 그어야 하는 건축가처럼,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이사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이 냉장고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완전히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가득 채울 수도 없었다. 이사 전날까지 먹을 만큼만, 딱 그 정도로만.


무언가를 버리는 건 감정의 일이었다.


그건 지난 몇 주 동안 충분히 경험했다. 주식을 정리할 때도, 마음이 먼저 이 집을 떠날 때도, 냉장고를 비울 때도 그랬다. 손끝이 떨리고, 가슴 한쪽이 아려오고,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감정들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채우는 건, 결심의 일이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떤 식재료를 사서,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그것은 과거를 정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미래를 향한 의지,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낼 결단력.


나는 마트에 갔다.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카트를 밀었다. 일주일치가 아니라 삼일치만. 냉동식품이 아니라 신선한 것들로. 대용량이 아니라 소포장으로. 모든 선택이 이전과 달랐다.


계산대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이사 후 첫 장보기는 어떨까. 새로운 동네의 새로운 마트에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진열대를 따라 걸으며, 새로운 브랜드들을 발견하게 될까.


어쩌면 이건 단지 냉장고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나를 다시 설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장본 것들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나는 조심스러웠다. 이전엔 익숙함에 따라 샀던 것들이 있었다. 매주 같은 요일, 같은 마트에서, 같은 브랜드의 우유를 사고, 같은 종류의 빵을 집어 들었다. 할인 행사에 끌려 냉동실에 쑤셔 넣었던 무언가들, 언젠가 요리할 거라고 생각하며 야채칸에 방치했던 재료들.


이젠 그러지 않으려 한다.


나는 조금 더 고르고, 느리게, 그리고 나답게 채워보고 싶다. 정말 필요한 것만, 정말 먹고 싶은 것만, 정말 이 새로운 삶에 어울리는 것만.


라이언이 부엌 바닥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치즈테비 고양이는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태연했다. 냉장고가 비워지든 채워지든, 자신의 밥그릇만 제때 채워지면 그만이라는 듯이.


나는 라이언에게 새로 이사할 집에 대해서 여러 번,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라이언아, 새집은 지금보다 조금 더 넓어. 거실도 더 크고, 창문도 더 많아서 햇살이 더 잘 들어올 거야."


고양이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이해하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도 있어. 지금보다 더 넓은 창가 선반이 있어서 거기서 낮잠 자기도 좋을 거야. 그리고 제일 좋은 건 말이야, 지금 우리 집은 동향이잖아? 새집은 남서향이야. 그러니까 해가 더 늦게까지 들어와서 훨씬 더 따뜻할 거야."


라이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발치에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너도 알잖아, 지금 집은 오후가 되면 금세 그늘져서 쌀쌀해지는데, 새집은 저녁 늦게까지 햇살이 따뜻할 거야. 네가 해바라기하기 정말 좋을 거야."


나에겐 단지 이사일지 모르지만, 녀석에겐 우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이에게 집이란 전 세계나 다름없다. 우리가 지역을 옮기거나 직장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변화다. 라이언에게는 이 집의 모든 모서리, 모든 냄새, 모든 소리가 그의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거실 소파 밑의 좁은 공간, 침실 옷장 위의 은밀한 자리, 현관문 옆 신발장의 그림자진 틈새.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익숙하고 안전한 영토였다.


그런 녀석에게 새집으로의 이동은 어쩌면 평행우주로의 이동과도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낯설 거야, 라이언아. 새로운 냄새들, 새로운 소리들. 벽의 질감도 다르고, 바닥의 느낌도 다를 거야. 하지만 우리가 같이 갈 거니까 괜찮을 거야."


나는 라이언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계속 설명했다.


"네 밥그릇도 똑같은 자리에 놓을 거야. 지금처럼 부엌 구석, 조용한 곳에.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담요도 가져갈 거고, 장난감들도 다 가져갈 거야.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건 아닐 거야."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같은 물건들을 가져간다 해도, 새로운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걸. 같은 밥그릇이라도 새로운 부엌 바닥에 놓이면 다른 밥그릇이 되고, 같은 담요라도 새로운 거실에 펼쳐지면 다른 담요가 된다.


"혹시 무서우면 내 침대 밑에 숨어도 돼. 처음 며칠은 그럴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적응하면 되는 거야."


라이언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루밍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귀는 내 목소리를 향해 쫑긋 서 있었다. 어쩌면 고양이만의 방식으로 이 모든 정보를 처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도 이사를 할 때마다 작은 평행우주를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나이지만 다른 동네에서 사는 나, 같은 직업이지만 다른 집에서 아침을 맞는 나. 그런 미묘한 차이들이 결국 완전히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그래도 우리는 함께니까 괜찮을 거야, 라이언아."


고양이에게는 철학이 없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잔다.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현명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더욱 절대적이고 충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서, 모든 행위에 상징을 부여하고, 작은 선택에도 철학을 담으려 한다. 때로는 그것이 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 냉장고는 더 이상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내 일상의 창고가 아니었다.


며칠 후면 새집으로 옮겨질 이 하얀 박스는, 다시 짓는 우주의 '첫 구조'가 될 예정이었다. 그 안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내 새로운 일상의 색깔과 리듬이 결정될 것이다.


문득 건축을 시작했던 초심이 떠올랐다.


첫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의 설렘과 두려움. 빈 땅에 서서 무엇을 지을 것인가 고민하던 그 순간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던 그 시간.


지금의 나도 그때와 비슷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시작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냉장고라는 작은 공간부터 시작해서, 점차 내 삶 전체의 구조를 다시 그려나가는 것.


이사 준비는 계속되고 있었다. 박스를 접고, 물건을 분류하고,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는 일.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이제는 새로 채우는 일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냉장고의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다짐했다. 새집에서는 더 신중하게, 더 의식적으로 살아보겠다고.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그것이 나를 다시 설계하는 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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