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7 – 책으로 쌓은 성벽
Part.7 – 책으로 쌓은 성벽 by 망치든건축가
책박스는 열여섯 개가 넘었다.
정확히는 열일곱 개였다. 마지막에 발견한 작은 박스 하나까지 포함해서. 누구는 그걸 "좀 많네"라고 했지만, 실은 그게 나였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혼잣말.
나는 내 문장들로 거실 전체를 점령했다.
소파 앞에는 더 이상 앉을 공간조차 없었고, 바닥은 어느새 4단 높이로 쌓인 박스들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벽이 되었다. 처음에는 임시로 쌓아둔 것이었다. 새로운 책장을 사기 전까지만, 며칠 정도만 이 상태로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책장은 이자리에 없다.
이상하게도 이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책들이 만들어낸 이 임시적 구조물이 가진 독특한 매력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성벽이군."
그리고 느꼈다. 나는 지금 이사 온 새집에서 성을 지키는 병사처럼 살고 있다고.
건축을 공부할 때 요새 건축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중세 시대의 성들, 그 높고 두꺼운 성벽들이 어떻게 내부를 보호하는지에 대한 이론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이론일 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내가 직접 성벽 안에서 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저 박스들 사이에서 익숙한 제목들의 실루엣이 떠오르곤 했다.
거실 조명을 끄고 복도의 희미한 불빛만 남겨두면, 박스들이 만든 그림자가 벽에 투영되었다. 네모난 형태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패턴. 그 속에서 나는 상상했다. 이 박스 안에는 『백년의 고독』이 들어 있고, 저 박스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잠들어 있다고.
내 기억과 감정이 벽돌처럼 박혀 있었다.
각각의 책에는 그것을 읽던 시절의 내가 들어 있었다. 20대에 읽었던 철학서들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열정이 담겨 있었고, 30대에 읽었던 소설들에는 사랑과 이별의 경험들이 스며 있었다.
그 중엔 무너뜨리고 싶은 문장도 있었다. 지금 다시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은 자기계발서들, 한때 감동받았지만 이제는 유치하게 느껴지는 에세이들. 하지만 그것들마저도 내 성벽의 일부였다.
두고 온 사랑도 그 안에 있었다. 그녀와 함께 읽었던 책들, 서로에게 추천했던 소설들. 페이지 곳곳에 남겨진 그녀의 연필 자국들, 여백에 적힌 짧은 메모들. "재미있네", "이 부분 좋다", "나중에 이야기해보자".
더는 펼치지 않을 페이지들도 있었다. 읽다가 중단한 채로 책갈피가 꽂혀 있는 소설들, 끝까지 이해하지 못해서 포기한 철학서들. 그런 미완의 독서들이 쌓여서 만든 성벽.
라이언은 이 책 성벽을 탐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고양이에게는 박스의 내용물이 중요하지 않았다. 책이든 옷이든 그릇이든, 박스는 그냥 박스였다. 오를 수 있는 높이, 숨을 수 있는 틈새, 발톱을 세울 수 있는 표면. 그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라이언이 박스 꼭대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 치즈테비고양이는 자신이 책들로 이루어진 요새의 망루에 서 있다는 것을 알까. 아마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거대한 책의 성벽을 아직 허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벽이 없으면 나는 아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집에서의 삶이 아직 익숙하지 않고, 새로운 일상의 리듬이 아직 몸에 배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들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성벽을 보면, 나는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책들을 읽어온 사람이고, 이런 생각들을 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박스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 내 지적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것.
새로운 책장을 들이기 전까지, 나는 이 벽을 지킨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쌓기 위해서.
새로운 공간에 맞는 새로운 배치를 위해서. 새로운 분류 체계를 위해서. 새로운 읽기의 순서를 위해서. 이 성벽은 파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삿짐을 옮긴 다음 날, 나는 이케아에 다녀왔다. 거실장을 보러 간 것이었다. 에케트EKET 시리즈를 둘러보며 어떻게 커스텀할지 계획을 세웠다. 기본적으로는 인프레임(in-frame) 이나 플러시 마운트(flush mount) 구조에 가깝지만, 몸통에 상판과 문은 큐링합판으로 바꾸고, 비정형 오버레이나 상판까지 올라오는 아웃셋(outset) 도어형식으로 변형할 생각이었다. 이케아 해킹이라고 부르는, 기본 제품을 변형해서 내 용도에 맞게 만드는 일.
거실장 하단에는 보지 않는 책들을 쑤셔 넣을 예정이었다. 문을 달아서 보이지 않게 하고, 위쪽에는 간단한 소품들만 둘 생각이었다. 정말 보고 싶은 책들은 작은 방에 따로 적재할 계획이었다.
거실은 미니멀하게 만들고 싶었다. 책도 없고, TV도 없고, 딱 3인용 소파만 있는 공간. 이 책 성벽들이 사라지면 얼마나 깔끔해질까 상상해봤다.
하지만 아직은 주문하지 않았다. 무언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책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둬도 괜찮을까. 정말로 거실에서 책을 완전히 없애버려도 될까.
그 확신이 설 때까지, 나는 이 성벽과 조금 더 함께 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천천히 계획을 세웠다. 어떤 책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지, 어떤 책들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어떤 책들은 구석진 곳에 둘 것인지.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박스들 사이에 작은 통로를 만들어 그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그 공간에서는 마치 도서관의 비밀 서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이언도 그 통로를 따라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고양이와 나, 그녀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책들의 성벽. 임시적이지만 완전한 하나의 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