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한강대교 옆에서
한강대교 옆 인도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남긴다. 정확히 말하면, 감정이 남는 자리는 아니다. 다만, 감정이 한 번쯤 지나갔다 가는 자국 같은 것들이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춰 조용히 흘러 있다. 무언가를 놓친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기. 말없이 걷는 이들이 자주 걷는 길. 그리고, 나도 오늘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오후 4시 23분. 습도 67퍼센트, 기온 섭씨 28.4도.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들고 걷는 속도는 분당 약 67보 정도였다. 쉰을 넘긴 나이에도 걸음의 속도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회색 인도 위로 파란 말풍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잘 지내니..? 0412"
도시의 구조물들 틈 사이, 낡은 철제 난간과 빌딩 숲 사이 어딘가에 그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얼굴로 걸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에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가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도시의 공기 중에 스스로를 고정시킨 듯한 느낌.
0412. 4월 12일.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롯데 멘토스를 하나 입에 넣고 씹으며 생각했다. 멈추는 데엔 별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어떤 감정은 구조가 없고, 어떤 기억은 경계도 없이 작동한다. 숫자 네 개가 만들어내는 조합, 그 단순한 배열이 묘하게 오래된 것을 꺼내지는 순간이 있다.
스무 살이 넘어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그 날짜는 매년 찾아왔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짜를 축하해 주었다. 아주 오랫동안.
*
4월 12일. 너의 생일이었다.
기억은 늘 희미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처음부터 선명했던 적은 없다. 대개는 어떤 이미지, 소리, 혹은 냄새가 먼저고 그다음이 감정이고 마지막이야말로, 겨우 구체적인 정보가 따라온다.
내 경우, 그 순서는 이랬다.
케이크 위의 초. 분홍색 포장지. "생일 축하해." 그리고, 그때 네가 웃던 방식.
오후 6시 30분경이었다. 혜화동 작은 카페, 테이블 번호 7번이었던 것 같다. 에스프레소 두 잔과 치즈케이크 한 조각.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는 클래식 음악을 트는 카페가 꽤 있었다.
그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1990년대의 어느 오후였다. 하지만 네가 그때 했던 말은 지금도 남아 있다.
"생일이 뭐 그리 중요해. 그냥 하루가 지나가는 거잖아."
나는 포크를 들고 있는 채 잠시 웃었다. 그 말은 당시의 나에겐 이해하기 어려웠다. 스물세 살의 나는 날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스물한 살의 너는 날짜 밖의 것들을 자주 말했다.
어떤 날은,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기념일을 기억했고, 너는 기념일 사이의 평범한 하루들을 소중히 여겼다. 나는 달력을 믿었고, 너는 기분을 따라 살았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 카페에서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자주 침묵했다. 그건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종의 구조 같았다.
나는 그걸 '적당한 거리'라고 불렀다. 너는 그런 말을 싫어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편의점에 들렀다. 그때는 미니스톱이나 세븐일레븐 같은 곳들이 막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너는 하리보 젤리를 골랐고, 나는 우유를 들었다. 지금은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젤리가 몇백 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종이팩 우유의 삼각형 주둥이를 뜯으며 너에게 물었다.
"내년에도 생일 축하해 줄까?"
너는 젤리를 씹으며 대답했다. "생일은 매년 오잖아. 굳이 약속할 일은 아니지."
나는 그때 무슨 말을 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늘 그랬다. 중요한 순간에 침묵하는 사람.
*
마지막으로 함께한 4월 12일은 1990년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미세한 봄비가 오후 내내 내렸다. 우리는 종로구 어딘가의 작은 일식집에서 우동을 먹었다. 키츠네 우동과 단무지. 그때는 일본 음식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생일을 별것 아닌 일로 여겼다.
"왜 매년 축하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하루 늙는 거잖아."
나는 젓가락을 들고 있는 채 너를 바라봤다.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가게 안에서는 NHK 뉴스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이가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해 여름 헤어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마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그리고 그 후로 35년이 흘렀다.
*
오후 4시 37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나는 아이폰을 꺼내 오늘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2025년 6월 30일. 1987년 4월 12일로부터... 계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난날이었다.
올해도 나는 너의 생일을 놓쳤다. 아니, 정확히는 챙기지 않았다. 챙길 이유도, 챙길 방법도 없었으니까.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말풍선을 한강대교 옆에 걸어두었다. "잘 지내니?"라는 물음과 함께. 0412라는 숫자와 함께.
나는 그 파란 말풍선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잘 지내고 있나?
사실, 잘 모르겠다. 잘 지낸다는 게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나는 결혼했었고 아이들을 키웠고 회사에서 그만두었다. 여전히 날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여전히 기념일을 기억한다. 여전히 시간을 숫자로 계산하고, 여전히 중요한 순간에 침묵한다.
다만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가끔 기념일 사이의 평범한 하루들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너처럼.
어쩌면 너는 맞았을지도 모른다. 생일은 그냥 하루가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하루를 기억해 주는 마음은, 지나가지 않는다.
*
오후 5시 12분.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파란 말풍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은 채, 태연한 얼굴로.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모레도, 그다음 달도. 그리고 아마 내년 4월 12일에도.
나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평범한 볼펜이었다. 몽블랑이 아닌. 그리고 그 말풍선 옆 난간에 작은 글씨로 적었다.
"생일 축하해. 35년 늦었지만. - 날짜를 기억하는 사람"
그게 전부였다. 더 쓸 말은 없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정말로 그냥 지나가는 것일까.
한강대교 옆 인도가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다른 기억으로 그 공간을 살아가게 되는 것.
오후 5시 47분. 지하철 3호선에서 환승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파란 말풍선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무언가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들. 기억되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
어쩌면 그게 네가 말하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일을 기억해 주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
*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혜화동 카페에서, 우리는 여전히 스물셋과 스물하나였다. 치즈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바흐의 음악을 들었다. 너는 여전히 "생일이 뭐 그리 중요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기억해 주는 건 중요하지."
그리고 너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도, 4월 12일은 선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젊었다.
*
며칠 후, 나는 다시 그 길을 걸었다. 파란 말풍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뭔가 추가되어 있었다.
"고마워. 오래 기억해 줘서. - 0412"
누가 적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너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와 같은 누군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떤 날들은 35년이 지나도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억들이 때로는 우연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것.
한강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물 위의 빛들이 다시 한번 질서 없이 흩어졌다가 모였다.
나는 이제 안다. 날짜도 중요하고, 날짜 사이의 하루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너와 내가 모두 옳았다는 것을. 단지 그걸 깨닫는 데 35년이 걸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