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모 Nov 13. 2020

1. 이유를 찾아서

상담을 받으면 나아지는 거 아니었나요?


사람마다 상담을 결정한 이유는 정말 다양할 것이다. 당장 눈앞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조언을 얻기 위해,

또 상처 받은 나를 돌보기 위해.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상담실로 들어온다. 아주 섬세한 마음으로, 양파 껍질 안쪽에 잘 쌓여있는 아릿함으로,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랐고, 또 다른 해석과 그에 곁들인 따뜻한 위로가 절실했었다. 참 애석하게도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나 이만큼 아프다! 하고 소리쳐 말할 용기가 나에겐 없었기에 모르는 사람이라도 붙잡아야 할 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생판 처음 보는 상담사를 찾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찾아간 낯선 곳에서, 나는 내가 원한대로,  위로도 받고,

'참 힘들었겠어요.', '잘 견디고 잘 살아낸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새로운 시각으로 내 상황을 바라보기도,

'지금의 네모 씨는 그때의 네모 씨에게 뭐라고 하고 싶어요?', '그때의 주변 상황을 바꿔 볼까요?'


지지받고 내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아주는 느낌이었다.

'네모 씨 잘못이 아니에요.',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은가요?'


텍스트로 읽으니 삭막하게 다가오는데 그때의, 남 앞에서 눈물 보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안구 표면에 가득한 물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모든 따뜻한 말들에서 모순을 느꼈다. 당장 다음 주부터 내가 가지 않으면 끊어질 이 관계에서 시작된, 공중에 흩어지는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 상황에 직접 처해보지 않은 상담자가 내게 공감하는 것에 내가 공감하지 못했고, 과거의 고통으로 나만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가라앉고 있는 나를 선생님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느낌. 거들어주려는 한 마디에 다시 나는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다. 고통스러운 공간에서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은 '지금 몸 상태가 어떤가요?'라는 질문에 간단히 답해질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 느낌은 상담 시간에도, 상담이 끝난 뒤에도, 상담에 가기 전에도 오랫동안 나에게 견디기 힘든 역겨움을 선사했다. 내 고통을 마주 보는 과정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는 한 형태임을 내 머리는 알았지만 정서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내담자인 나는 상담을 가기 전, 최대한 많은 후기를 찾아 읽었었다. 가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회기는 얼마나 받아야 하며, 상담받고 느끼는 감정들과 후폭풍에 대해서까지. 상담사의 입장, 내담자의 입장들을 번갈아 가며 훑어보았다. 심리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내 감정과 상태를 이해하려는 나름의 노력들을 해왔기에 상담에서 이 고착된 문제를 얼른 치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될 문제였다면, 난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아도 됐었다.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와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내 우울은 계속 이어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0. Prolog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