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해, 내 눈을 가려주기로

잠깐 멈추어 설 수 있도록

by sooookhee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디디는 발걸음이 더 깊은 나락으로 향한 것이라면. 기를 쓰고 나아간 한 걸음만큼 내 목을 감싸 쥐는 밧줄이 바특해지고 있다면. 발버둥 칠수록 숨 막히는 아침을 숙제처럼 떠안은 채 울지도 못하고 보름의 낮과 밤을 뜬눈으로 견디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너의 상냥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려줘.


깊은 손톱자국, 하얗게 질린 손아귀를 펴보면 먼지 한 톨 없는 마알간 빈손. 무엇을 쥐고 있었나. 무언가 정말로 쥐고 있긴 했었나, 어리석은 나는. 멈추지도 못하고 모든 힘을 짜내어 교수대로 걸어가고 있는 나를, 혹시라도 네가 발견한다면 너의 두 손으로 나의 눈을 가려 줘. 지친 내가 잠깐 걸음을 멈출 수 있도록.


너의 상냥한 손이 어둠을 가려주면 보름의 낮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나는 꿈처럼 잠들겠지.

눈이 멀어버릴 듯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이 오면 깨어나, 이 꿈에서의 야반도주 계획을 세울게.

그러는 사이 이 모든 게 다 꿈처럼 괜찮아질지도 몰라. 그러니 꼭 내 눈을 가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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