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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여행의 이유: 가려진 것들이 건네는 힘

written by 강 세화



오늘 같은 날이면 어디론가 여행을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해야 할 일들은 이미 내 턱 밑에서 나를 위협하는데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것들을 안아주지도 못하는 날. 여행 생각을 하며 가만히 휴대폰을 두들기다 문득 언니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블로그에 여행기를 올릴 거 라며 열심히 사진 보정을 하는 언니에게 ‘하나하나 보정하고 자세히 기록하면 안 힘드나?’ 라고 했더니 “니도 여행 한번 다녀와보면 느낄걸, 여행 또 가고 싶어서 살아진디. 나는 힘들 때 그거 보면서 버틴다이가.”  

음, 글쎄. 어쩌다보니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부터 매 방학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여행이라는 게 언니 말처럼 되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한 기억만 남게 된다면 참 이상적이겠으나, 막상 생각해보면 항상 썩 유쾌하지 않은 일들이 내 여행을 망쳐서, 즐겁고 멋졌던 기억보다는 고생했던 기억이 먼저 피어올라 기분좋은 회상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했던 내 첫 여행처럼.


3년 전, 언니가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란히 졸업을 맞은 우리는 졸업여행으로 함께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만의 수도인 타이페이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의 촬영지가 있는 담수이 여행으로 이틀을 보낸 후, 대만에서의 세번째 날이 되던 때였다. 3일차 일정은 타이페이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타이루거 협곡 유람. 타이페이에서 화롄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 셔틀버스를 통해 협곡 행 코스를 따라 자연경관을 맛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태평양이 맞닿아있는 바다, 칠성담을 들렸다 협곡으로 가기로 했다. 칠성담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에 취해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다시 타이루거로 향하는 버스를 탈 때, 문제는 발생했다. 

처음 우리가 칠성담으로 왔을 때 탑승했던 버스는 누가 봐도 ‘나는 투어용 셔틀버스요~’ 하는 느낌의 깔끔한 외관인데다, 사람이 많아서 아무 생각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이 타려던 버스는 기사님을 포함해 다섯 명. 그것도 나와 언니 빼고는 전부 남자고, 버스도 허름하고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낡아서 헤진 좌석시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금 퀴퀴한 냄새. 이 버스가 타이루거로 향하는 버스가 정말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탔지만, 여전히 언니와 나는 불안해하며 휴대폰만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한 중년 남성이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우리 에게 띄엄띄엄 말을 걸어왔다. 그 아저씨는 누가 봐도 현지인이었고 옆에 앉아있던 무뚝뚝한 여행객에게 대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자,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우리에게 다시 대화를 시도하려 한 듯했다. 처음에는 붙임성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아저씨의 ‘TMI’를 가만히 들어주고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얼른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검은 껌을 내밀며 먹으라고 자꾸 권하는 게 아닌가. 

그 때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생각.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가는 허름한 버스 안, 유일한 일행인 단 둘이 서로만 의지해서 가야 하는 상황에 겁을 먹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시 저걸 먹으면 우린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들었다. 과부화 된 내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나는 얼결에 일단 받아먹고야 말았다. (다행히 그 껌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 껌이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함부로 받아먹지 말자). 그런데 그 아저씨가 웃으며 “you, you eat this, you are my wife one night’ 라고 하는 게 아닌가. 회심의 유머를 던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고 짜증 나게 해맑은 얼굴이 정말 한 대 치고 싶었다. 불쾌하다, 무례하다 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도 전에 진짜 소위 말하는 ‘빡친’표정으로 “What?” 하고 인상을 구겼더니 그제서야 “sorry, sorry! Joke!” 하 면서 웃었다. 현지인에게 당하는 성희롱이란… 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계속 대화를 차단하려 시도했으나 꿋꿋하게 말을 거는 아저씨에 의해 그 시도는 실패했다. 게다가 여기서 내려야 한다며 그 아저씨에게 등 떠밀려 내린 곳조차 잘못 내린 곳이었고, 다시 버스를 타야 했던 당황스럽고 짜증나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필요 없는)동행을 자처해 따라오는 아저씨를 떼어내고 나서야 겨우겨우 다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나니 하행선 막차까지 30분 남았던 탓에 결국 협곡 구경은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결국 그 아저씨의 놀라운 활약으로 일정도 꼬이고 컨디션도 최악으로 떨어져 너무 지쳤던 기억이 남는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언니는 이런 일을 함께 겪었는데도 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다니. 대만 여행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언니와 함께 했던 다른 여행지에서도 항상 문제가 있었고, 울고 싶을 때를 맞닥뜨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은데도 겁도 없이 또 여행을 가고싶다니. 앞서 두려움을 회고했던 나조차도 내 앞의 막막함에서 도피처로 여행을 찾지 않았던가. 여행이 무서우면서도 좋은 이 모순적인 감정은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다. 여행이라는 건 본래 예상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때가 있을지라도, 나를 기쁘게 하는 깜짝 선물 같은 순간들도 그 변수들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한 무뢰한 때문에 일정을 망쳐서 여행의 모든 기대를 저버리게 되었지만, 길을 잃고 곤란에 빠졌을 때 본인의 일인양 열심히 알려주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의 친절과 따뜻한 미소를 기억한다. 비록 산 깊이 대자연을 맛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내가 보았던 칠성담의 옥빛 바다와 쪽빛 하늘, 촉촉한 공기와 넓은 그 공간, 또 담수이의 짠 공기와 타이페이의 야경을 기억한다. 지친 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서로에게 틱틱대며 짜증내고 망친 기분을 표했었지만,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고 떠들었던 순간를 기억한다. 헤매고 없는 정신에 끼니도 잘 해결하지 못해서 서러웠지만 다음날 먹었던 맛있는 버블티와 따뜻했던 훠궈를 기억한다.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나에게 큰 선물이 되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니 ‘그럼에도’ 여행을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싶다. 

어두운 감정에 가려져 기억해야하는 것들을 잊고 침체되어 있으면 즐거운 일을 환영하지 못하게 되는 법. 답답하고 턱 막히는 일상에서 비일상을 꿈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볍게 잊고 다시 나를 웃게 해줄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분명 또 다시 일상 속에서 불청객처럼 찾아온 우울감을 피해 여행을 떠올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만히 눈을 감고 새로운 도시로의 일탈을 꿈꾸거나, 기록해 뒀던 비일상을 누비겠지. 그리고 결국 긴긴 무의식의 여행을 끝내고 나면 턱 막혔던 숨이 풀리고, 나를 따스하게 해줬던 기억들이 나의 힘이 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웃으며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팔 벌려 맞이할 새로운 비일상을 꿈꾸며 말이다.  



____ 강세화 glorysehw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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