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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9. 2020

이혼 법정, 남편의 흥정

이혼 전 이야기 #.23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판사는 계속 양측이 자기주장만 하다가는 끝나지 않는다며 강제조정보다는 서로 조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판사는 피곤해 보였다.


짜증이 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내 마음이 그랬던 걸까.


판사는 친권은 공동이겠으나, 아이들의 양육권은 엄마인 내가 갖는 것이 맞다고 했다.


월급도 작았고 남편보다 이사도 잦았지만 엄마인 내손을 들어줬다.

싸웠던  양육권을 법으로 보장받는 순간이었다.

죽을 수도 있었던 나를 법이 살리고 있었다.


양육비를 아빠가 지급해야 하는 것도 맞다고 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남편은 과거 4년 동안의 미지급한 양육비도, 결혼생활 파탄에 대한 위자료도 돈이 없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돈이 없는 것보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는데 기필코 주지 않겠다는 투지만큼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판사는 양육비 산정표대로 향후 아이 둘에 대한 양육비를 받는 걸로 조율하면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럼 혼인파탄에 대한 책임은요? 과거 양육비는요? 폭행, 외도, 식구들 방치는 무죄인가요?"


대답을 하지 못하는 판사의 깊은 숨소리만 들렸다.

볼펜을 똑똑거리는 소리가 징소리만큼 크게 울렸다.



배우자에 대한 위자료 0원.

과거 양육비 0원.

결혼생활이 쓰레기가 되도록 방치하고 아이에게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어떤 경제적 책임도 다하지 않은 남편에게 묻는 책임은 모두 0원이었다.


내가 힘들게 감당했던 시가 사람들, 결혼생활,  기억하기도 싫은 폭행, 또 그 여자에 대한 나의 마음고생도 0원이었다.



"저희도 최대한 많이 양보하고 배려했습니다. 이미 4천만 원을 입금해 드렸기도 했고요."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변호사가 감정 없는 얼굴로 판사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건 이혼 소송하기 전에 애들 아빠가 가져갔던 내 보험금을 되돌려 받은 것뿐입니다. 이자도 한 푼 없이요! 공동으로 이룩한 재산이나 위자료가 아니라 저의 보험금이었다고요."


기가 막혔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고 책상 위로 뛰어올라서 남편과 그쪽 변호사에게 이단옆차기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현재 상황>
이미 지나간 세월에 대한 양육비와 위자료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남편은 매달 월급이 있기 때문에 향후 양육비를 못 준다고는 하지 못한다.


"심정은 알겠으나, 남편분에게 그간의 양육비를 전부 소급하여 내놓으라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판사가 말했다.


"네 맞습니다, 판사님! 저는 어머니 병원비도 매달 내고 있기 때문에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해야 되거든요."

눈을 반짝이며 밉살스럽게 남편이 말을 보탰다.


......

더 이상 과거 운운하며 돈을 달라고 하기엔 고약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 좋습니다. 애들 아빠네 형제는 7남매이니 어머니 병원비를 각자가 나눠내기만 해도, 양육비를 못줄 정도로 쪼들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자식 된 도리는 하겠다면서 아버지로서의 도리는 하기 싫어 애들 입에 들어갔어야 할 몫을 저렇게 주기 싫다는데, 제가 할 말이 있나요.


혼인파탄에 대한 위자료, 폭행, 외도에 대한 위자료 제가 안 받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아이들의 양육비로 지급되었어야 할 그 돈도 안 받겠습니다."


"......"


개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적막했다.


여기서 더 주장을 하

어쩌면 아이들이 매달 받는 양육비마저 낮게 부를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간 것을 못 받는다면 앞으로의 몫은 확실하게 받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아이 둘 다 10년 안에 대학에 들어갑니다. 위자료와 과거 양육비를 대신해, 대학입학금과 등록금은 정확히 1/2을 애들 아빠가 부담하도록 해주십시오. 양육비와는 상관없이 이행하도록 판결문에 명시해주세요.


그리고 애들 아빠의 권리이기도 한 면접교섭권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아이들과 무조건 만나도록 지정을 해주십시오. 아이들이 곧 사춘기가 와요, 아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꾸준히 만나지 않으면 금방 서먹해질 거예요. 우리 딸들 결혼할 때 아빠가 손잡고 입장은 시켜줘야 되잖아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침을 꿀꺽 삼켜봐도 계속 떨렸다.

하지만 덜덜 떨고만 있다가

시간이 지나 지금 이 순간을 땅을 치며 후회할까 봐 두려웠다


남편은 내 말이라면 일단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해야 할 말을 판사에게 대신하고 있었다.


열에 아홉 번은 내가 데려다주겠다는데도 일을 핑계로 약속을 핑계로 아이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잦았다.

아빠가 바쁘다고 했다며 아이들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것이 매를 맞는 것처럼 아팠다.


남편은 더 이상 NO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미 흘러간 과거 양육비는 의무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남편에게 나는 '미래'라는 카드를 던졌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남편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조삼모사 같은 놈.

멍청한 자식.

착하게 판사에게 대답하는 것을 보니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럼 소송비는 각자가 부담하기로 하고 매달 75만원씩 150만원을 양육비로 지급하세요. 됐죠?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끝나는 듯했다.

드디어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남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다급해 보였다.


"저 판사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하세요."

"저기... 그런데 양육비 150만 원은 너무 많습니다. 저도 돈 들어가는 데가 많고 어머니 병원비도 내야 하고... 제 생활도 해야 하고요..."


하아...

남편은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양육비를 깎아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이들이 뭘 먹고 크는지 어떻게 사는지

뱃멀미 한번 감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자기도 살겠다고

물건값도 아닌데 양육비를 깎자.


판사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쪽 변호사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허탈했다.

멍청이 쇼를 보고 있는 듯했다.


"과거 양육비, 위자료, 다 양보하셨잖아요. 그래, 얼마를 깎고 싶으신데요?"

"오... 오만 원씩이라도 안될까요?"

"오만 원씩 두 명이니까 십만 원? 십만 원이면 되시겠어요?"

판사도 어이없는지 웃으면서 되물었다.



개자식...

내 아이들이 흥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내 피 같은, 내 생살 같은, 내게 붙어있는 숨 같은 내 새끼들이 내 아이들이 내 인생이 흥정이 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쥐어짜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쓸어가려고 했다.


안됩니다, 판사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판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답했다.

테이블은 다시 원점으로 가는 듯했다.


......

모두가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내가 조용히 침묵을 깼다.

흥정을 하는 남편에게 협상카드를 던져야 했다.


"좋습니다. 아이들 오만 원어치 고기 덜 먹이겠습니다. 오만 원어치 제가 더 아껴 쓰지요.

하지만 애들 몫을 깎은 것이니 그냥은 안됩니다.

10만 원 덜 받는 대신 친권을 저한테만 주십시오."




양육권은 소송으로 싸워서 내가 갖게 되었다.

친권은 양쪽에게 동일하게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마저 할인받으려는 행태에 공짜 당근을 던져주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나라면

내가 남편이라면

마지막 남은 아버지로서의 자존심 아니 마지막으로 내가 아이들을 위해 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권리, 친권.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더 썼으면 썼지 빼앗기긴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친권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란 이유로 아주 쉽게 주어졌다.

남편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언제든지 내가 아이들을 만나게 해 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친권이란 것이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겐 달랐다.


열 달을 품고 있다가

생살을 찢어가며

과다출혈을 불사하며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젖몸살에 어금니가 깨지도록 이를 악물었

밤을 새워 서투른 품으 아이를 안아 젖을 물렸다.


그래도 바보처럼 행복한 웃음이 배실배실 나왔다.


직장 다니면서도 모유수유를 하고 싶어 점심을 굶는 대신 주차장 한쪽 구석 차 안에서 유축기로 젖을 짰다.

유니폼 왼쪽 주머니에 아이들 사진을 코팅해서 수첩과 함께 가슴에 늘 품고 다녔다.

이 힘들 때면 화장실에서 옷소매로 눈가를 쓰윽 훔치며 그 사진을 꺼냈다.


내게 친권이란 것은

제비 새끼 같은 내 아이들 입에 삼시세끼 따스운 밥을 넣어주고, 아플 때 아이들을 둘러업고 병원에 가서 당장 치료를 받게 서명할 수 있으며,


이 세상 어느 누가 와도 내가 이 아이들의 보호자라고 주장할 수 있고, 누구도 아이들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하도록 사납게 소리 지를 수 있는 권리였다. 책임이었다.


그런 친권을 달라고 한다면 '차라리 십만 원 아니 더 달라고 해도 내고 말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남편은 아주 쉽게 Yes를 외쳤다.

남편이 친권이라는 '십만 원 할인쿠폰'을 획득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혼하기로,

친권과 양육권 모두 내가 갖기로,

매달 양육비를 지급하기로 하고 끝이 났다.



법원을 나왔다.


당신은 이제 나에게 남편도 그 누구도 아냐.
철저하게 타인이야.
당신은 나에게 140만원짜리 자판기일 뿐이야.
하루라도 늦어봐, 직장에 쫓아가서 직원 관리 잘하라고 망신 주고 지랄을 해줄 테니까!

 


3시간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한 곳이 소송을 관할했던 법원과 었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고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눈꼬리로 끝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서 날아갔다.


'고속도로니까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려서 그런 걸 거야.'


콧잔등이 딱밤을 맞은 것처럼 아렸지만

빨리 도착해서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해줄생각하기로 했.

즐거운 날이니 오랜만에 애들한테 불고기를 먹일까 생각했다.




이혼은 괴롭다.

소송도 그렇다.


변호사, 가사 조사관, 판사...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볼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내 결혼생활의 치부부터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고 괴로운지 앞다투어 <고통 자랑 발표회>를 해야만 한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썩은 동태눈이었으면 이런 배우자와 혼인서약을 했는지에 대한 자아비판도 같이 들어가야 했다. 서로에게 '당신이 얼마나 쓰레기인지를 ' 깊이 탐구하고 연구하여 정식으로 문서화 해 알려줘야 했다.

날카로운 창과 더러운 걸레를 함께 던질 수 있어야 했다.


힘껏 던져 상대를 맞출수록

우리 같은 형편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운이 없고 지지리 복도 없는 아이들인지 낱낱이 증명하는 꼴이었다.



나는 며느리, 아내라는 명찰을 반납했고

직장 사람들, 지인, 가족... 나를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이혼녀라는 명찰을 새로 달았다.


두려웠다.

이혼녀라고 말해야 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내 자존심보다

이혼을 해서라도 아이들 몫을 받아내야 한다고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휴가를 냈다.

이혼신고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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