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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8. 2020

눈물 닦고 먹어. 그리고 계속 살아

이혼 전 이야기 #. 22

1월 30일 일기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불금...

냉동실에 덩그러니 남은 어묵 네 개를 넣고 끓인 라면으로 저녁 먹는다.

먹고 나서 조금씩 이삿짐을 싸야 한다.


술 한잔 곁들이고 싶었는데

눈물이 쏟아질까 봐 술을 꺼낼 수가 없다.


3년 전 삼천만 원짜리 달동네 허름한 전세방에서 이 섬으로 들어오기 위해 오늘처럼 짐 싸던 날 밤, 저녁으로 혼자 사 와서 먹었던 건 새우버거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햄버거를 한입 먹고 눈가 한번 훔치고 한입 먹고 훔치고...

꾸역꾸역 삐져나오는 울음소리 때문에 햄버거 크게 물어 입 틀어막던 때가 마치 어제 같다.


섬에서의 삼 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가고 

이제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 지긋지긋한 섬, 

베란다 밖 풍경,

그리고 이 집에서만 연출이 가능했던 가구 배치, 

이 집 냄새까지 나를 잡고 안 놓는다.


콧물과 눈물을 질퍽하게 얼굴에 바른 채 늘 내가 앉아서 멍때리던 식탁에서 다 불어버린 라면을 깨끗이 비우고 예전 그 날

그 시간처럼 

'... 이제 짐 싸야지?' 

혼잣말을 한다.


오늘은 아이들이 없어 다행이다.

그날처럼
혼자라서 참 다행이다.






유배생활을 끝내듯 그렇게 섬에서의 시간들이 끝이 났다.

중고 가구를 들고 들어갔던 섬을 나올 땐 습기에 틀어져 버린 장롱도 버리고 이젠 작아진 아이들의 주니어용 책상도 버려야 했다.


돈 한 푼 없이 들어갔지만 나올 땐 정기적금을 제외하고도 만원씩, 이만 원씩 넣은 통장에 천만 원이 넘는 현금이 쌓여 있었다. 


군청에서 아이들에게 주는 수당도 작지만 있었다.

그것도 '없는 돈'이라 생각하고 통장으로 무조건 모았다.

섬을 떠나는 날까지 쓰지 않고 저축했다.


육지에 나가게 되면 아이들에게 예쁜 책상도 사주고 아웃렛에 가서 예쁜 옷도 신발도 사줘야지 하는 생각에 매달 빠듯했던 생활비에서 얼마씩 떼어놓기로 작정을 했던 덕분이었다.



아이들을 아빠에게 데려다주고 다시 들어와 이사 갈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아빠와 가깝게 살던 동네로 이사를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곳으로 가면 남편뿐만 아니라 시누들까지 가까이에 있었다.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는 동선에 있었다. 

아직은 그 사실이 내게 힘겨웠다.


마침 강원도 바닷가 근처에 근무 자리가 비어있었다. 

"또 바닷가야?"

아이들 입이 삐죽 나왔다.

미안했지만 그곳으로 지원을 했다.

최대한 남편과 살던 동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곳엔 나와 남편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며 살 자신이 여전히 없었다.


특히 남편 직장상사 한분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매년 그분 생일이 되면 우리는 케이크를 들고 찾아뵈었었다.


별거를 하긴 했지만, 그건 우리의 문제일 뿐 

섬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뒤 그분에게 안부전화를 드렸던 적이 있었다.


그냥 내 피해의식이었을까...

내 전화를 떨떠름하게 받는 그분의 첫마디에 기분이 확 무너져 내렸다.


"섬에 들어갔다면서? 내가 00 아빠한테 뭐... 이런저런 얘기는 많이 들었어."

"... 무슨 얘기요?"


그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술을 먹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던 모양이었다. 


핵심은 내가 어머니를 구박했고, 결혼생활에 불성실했으며, 아이들을 꽁꽁 숨기고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급기야 아이들을 섬으로 데리고 들어가 버렸다는 클라이맥스를 전해주며 매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랜다는 불쌍한 시나리오를 들려주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양육비나 생활비는 한 푼도 주지 않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어긋난 결혼생활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고, 서류도 정리되지 않은 법적인 부부였지만, 남편의 입방아 덕분에 웬만한 사람들은 우리의 관계가 이미 파탄이 났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고 지냈던 대부분의 직장동료를 남편도 알고 있었기에 이미 남편의 말만 듣고 그의 편이 되어버린 나의 옛 동료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외롭지만 연락을 모두 끊었다.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발신번호가 뜨면 누군지 확인하고 받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어야 했다.


그 동네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아직은 너무 힘들었다.





3년이 좀 넘는 시간.
 마음으로 혹은 물질로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잘나서 잘 버티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진은 다 지워도 고마운 이 마음과 사진은 다 지울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섬에서 살아가고 버틸 수 있게 우리 가족에게 힘이 돼주었던 것은 결국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실수로 지워져 올리지 못한 인증샷도 많지만 감사한 마음은 저에게 꼭꼭 저장되어 있습니다.

떠나기 전 소중한 이곳 기억과 함께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많이 감사합니다.


섬에서의 마지막 SNS를 올렸다.

외로웠던 곳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을 쓰고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고 우리가 함께 한 순간순간의 사진을 올리던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


정말 떠날 때가 다가왔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볼지는 기약이 없었다. 어쨌거나 내 삶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을 곳이었다.


동시에 외로웠고, 혼자 싸웠고, 울었고, 아이들과 웃었고, 밤마다 악몽과 함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또 내가 정규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며 함께 숨죽여 울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남은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용기를 내어 소송장을 쓰던 곳이었다.



살다 보면 내가 있는 이곳이 가장 최악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환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내 머리가 그렇게 계산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멀미가 심한 아이들을 돗자리를 깔고 뉘어가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배터로 달려가 아이들을 담요로 감싸 차에 재워놓고 배가 들어올 때까지 1번으로 웅크리고 지켰던 그때 기억들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서럽기도 혹은 즐겁기도 한 기억이 될 수 있다.


물론 서러웠다.

대부분의 날들이 서러웠다. 

내 마음이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나간다고 마음을 놓긴 아직 일렀다.

섬에서 나가는 그 순간이 끝은 아니었다.

소송 중이었으며 예쁜 아이들은 사춘기를 접어들고 있었다.


서로에게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부모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가 오해를 사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아이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가며 뒷모습만 보여주더라도 이 울타리는 따뜻하게 계속 지켜내야 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였고 

먹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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