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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7. 2020

남편은 고부갈등이 흔한 세대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이혼 전 이야기 #. 21

최후통첩을 한대로 변호사를 통해 이혼소송에 들어갔다.

소장을 받은 남편도 곧 반격을 준비했다.

소장에 대한 답변서가 날아왔다.


법원에서 날아온 등기를 열어볼 용기가 없어 종일 째려보고만 있었다.

퇴근길 집에 들어가기 전 해변에 차를 세우고 봉투를 뜯었다.

답변서에는 오히려 이혼을 당해야 하는 건 나라며 맞소송을 해왔다.


남편의 답변은 이러했다.


*아내를 폭행한 것은 결혼기간 동안 단 한 번이었다. 그것도 시어머니를 무시하고 막말을 하여 우발적으로 한 폭행일 뿐 이혼사유가 되지 않는다.


*폭행사건으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길래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용서를 빌고 합의서를 받았다.


*오히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고부간의 갈등의 정도가 여타의 고부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미한 수준이다.


*3년간의 장기간 별거는 아내가 일방적인 이혼 요구를 하더니 섬으로 이사를 강행한 탓이다.


*아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각과 행동이 이기적으로 변하고 거의 밤마다 늦게 귀가하였으며 성관계를 거부하였다.


*부부관계를 피하는 그때부터 이미 혼인관계가 파탄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늦게까지 일하다가 버스가 끊겨서 데리러 와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매번 무시했다.


*나도 아이의 유치원 상담에 참여하고 소풍 때 도시락을 챙겨주는 등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이가 손가락질당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어머니는 아내에게 꼼짝 못 하고 지냈으며 아내 대신 아이들을 부양하고 집안 청소 등을 도맡아 해야 했다.


*치매 초기였던 어머니에게 아내는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을 했다.


*고부간의 갈등을 혼인 파탄 사유로 들고 있으나 특별한 증거도 없고, 세대차이에 의한 갈등일 뿐이다.


*아내가 의심하는 그 여자는 누나 같은 사람일 뿐 그 이상의 어떤 관계도 아니었는데 아내가 불륜을 인정하라고 일방적으로 강요만 했다.


*아내가 섬으로 간 것은 근무지가 그 지역으로 옮겨진 것일 뿐 자신은 별거를 원한적이 없다.


*아이들이 수시로 아빠에게 전화해 '외로워, 배가 고파.'라고 하였다.


*아내가 아이 양육에 전혀 관심이 없어 육지로 나올 때마다 행색이 엉망이어서 누나와 함께 다른 집에서 얻은 옷이며 학용품을 구해 주었다.


*아내가 양육에 관심이 없고 아이들을 방치한 결과 큰아이는 성조숙증 증상이 있고 작은 아이는 중이염 수술을 했다.

......

......





막장 드라마처럼(이미 막장이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당신도 내 소송장을 받았을 때 이런 기분이겠구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왜 없는 사실을 말할까?

혹시 직접 작성한 건가?

이렇게 쓴 거... 나중에 안 부끄러울까?


서로의 얼굴에 머드팩을 치덕치덕 발라주는 격이었다. 훗날 읽어도 나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나의 감정을 빼고 사실만 근거해서 적었다.

부풀려서 쓰기엔 있는 사건도 넘쳐났다.


주고받은 문자, 파출소, 병원서류, 그 당시를 기록한 일기, 카드 사용내역까지 근거가 있는 것만 가지고 소송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니었다.

답변서를 읽어보던 해변가에서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

우린 이렇게 밑바닥까지 보여줄 사이었나 봐. 당신이 내 아이들의 아빠라는 게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부끄럽다. 나는 절대로 당신 같은 생물학적 부모로만 살지는 않을 거야.


부끄러움을 알고, 하늘이 무서운 줄 알면서 살 거야.

적어도 당신처럼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진 않겠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옷도 얻어 입히고 중고 물건을 구해다 쓰기도 했다.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쑥쑥 클 것이기에 굳이 새 제품을 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비싼 옷을 입히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내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클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누가 교회 집사님 아이가 입던 옷이라며 가끔씩 갖다 주었고 나는 감사하게 입혔다.


별거를 하고 나서는 남편과 시가에 관계된 그 어떤 것도 보고 만지기 싫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 마음에서 비롯된 불편함일 뿐, 아이들을 봐서라도 신경을 곤두세우진 말자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고모가 예쁜 걸로만 골라서 갖고 오셨네, 잘 입겠습니다~ 하자


육지에 나갔던 아이들이 고모가 줬다며 옷 보따리를 갖고 오면 차곡차곡 아이 옷 서랍에 넣었다. 육지에 나갈 땐 일부러 그 옷을 말끔하게 입혀서 보내기도 했다. 성의는 고마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감정은 내 감정이고 아이들이 느끼는 고모나 아빠에 대한 생각을 내가 굳이 통제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나에게 '아이들 행색이 엉망이어서 누나와 함께 옷가지를 얻어다 보내줬다.'라고 쓴 것을 보며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 쓴웃음이 났다.

당신 참... 용쓰는구나


'고부갈등은 세대차이에 의한 흔한 갈등의 정도'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지. 당신이 봤을 땐 그 정도는 누구나 겪으며 살아간다는 거지?


그 답변서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다 보니 16장이 나왔다.

그렇게 반박문에 대한 답변서, 답변서에 대한 반박문...


나중엔 반박문을 받아 읽어보는 것조차 재미가 쏠쏠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정확한 날짜, 시간, 근거만 제시해서 반박하면 되었다.

하지만 다양하고 참 재미있게 창작을 하며 생떼를 쓰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서로에게 이를 악물고 칼을 던졌다.

칼을 맞을 때마다 더욱 뾰족하게 갈아서 상대에게 던져야 했다.



반소장을 받아보면서 궁금했다.

이런 사람을 변호하는 그 변호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가 변호사라면... 나는 이길 수 있는 아니, 변호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에게 돈을 받고 변호해 줄 것 같은데 남편은 이미 호갱님이 되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남편도 한심했지만, 그 변호사 사무실도 한심했다. 안쓰러웠다.

나중에 법원에서 그 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변호사끼린 기싸움이 팽팽했지만 나는 궁금해서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30대 중반 정도의 젊은 여자 변호사였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저런 변호를 하는구나. 저 여자도 나와 같은 여자이고 누군가의 며느리이고 누군가의 아내겠지.


결혼생활이 나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나 보다. 이런 쓸데없는 상념에 젖어있기도 했다.



해를 넘기는 소송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꾸준히 육지로 나가 아빠와 시간을 보내게 했다.

소송은 남편과 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혼소송과는 별개로 남편에게 받아야 하는 돈은 분양아파트 계약금 4천만 원과 땅을 산다며 가져간 3천만 원이었다.

그것은 부부가 힘을 합쳐 같이 이룩한 재산도 아닌 내가 암에 걸린 후 받은 보험금이었다.

(하긴 암 발병에 도움은 줬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끝내 땅 사는데 쓴 내 보험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질긴 독촉 끝에 3천만 원 중에 700만 원을 입금해줬을 뿐 이후에는 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적금이 만기가 되어 빌라를 계약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육지에서 아빠를 보러 나온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빼고 우리셋이 여기서 나중에 살자.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야 돼?"


아이들은 육지에 갔다 오면 종알종알 아빠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빠가 우리랑 놀아주지 않고 고모부랑 소주만 먹었어. 같이 놀아달라고 하니까 차에  뭐 가지러 간다고 해놓고 당구장으로 가버렸어."


그런 사람이 아이들을 자기가 키운다며 판사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나는 소송에서 이겨야 했다.

섬에서 1박 2일이 걸려 법원에 출석을 했다.

남편은 차로 30분 거리에서 직장을 핑계로 변호사만 보냈다.

그렇게 지루한 소송이 해를 넘기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었다.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으며 회사에서도 이제 그만 파견을 끝내고 육지로 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막막함에 울면서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3년 전에 들어왔던 이곳에서 정규직이 되어 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좀 더 편하게 아빠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섬에 살면서

갈 곳이 없어 멍하니 얹아있었던 바닷가에 가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나가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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