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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5. 2020

"변호사 준비해, 법원에서 봐 그럼."

 이혼 전 이야기 #.19

배터에 막 도착한 작은 배.

관광객들 사이에서 엄마가 조심조심 흔들리는 갑판을 밟고 나오시는 것이 보였다.

엄마집에서 갈 수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먼 곳.


그곳에 아이 둘을 데리고 내가 서 있었다.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1박 2일을 걸려서 엄마는 그렇게 딸을 보러 오셨다.


"네가 도대체 왜 이런데 까지 와서 살아야 되나 이것아..."


엄마가 섬에 발을 내딛으시며 처음 뱉은 말이었다.

이후론 별말씀을 안 하셨다. 그저 손주들이 잘 크는지 딸의 얼굴이 상하진 않았는지 눈으로만 훑으실 뿐이었다.


엄마가 며칠 머무르시다가 가시던 날 배터에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엄마, 나도 데려가면 안 돼? 왜 나는 여기 남아야 하지? 엄마, 나도 무서워. 엄마  엄마....."


집에 와서 일부러 밥을 두 공기를 퍼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허전했다.




섬에서 지냈던 그 시간들을 가끔 아이들과 나는 식탁을 두들겨가며 웃으며  소환한다.

하지만 깔깔거리며 웃다가 돌아서서 설거지를 할 때면 여전히 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육지로 아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아이들이 힘들게 견뎠던 뱃길.

그 파도 덕분에 큰아이는 지금도 배를 탄다고 하면 질색을 한다.

바다 비린내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딱히 이야기 나눌 사람도, 친구도 없었던 그곳에서 하루하루 겪어낸 것에 대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3.29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온 지 두어 달이 되었다.


십 년 뒤엔 이십 년 뒤엔 난 어떤 모습일까.

지금껏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로부터 용감하게 해방될 수 있을까.

더 이상 그것을 움켜쥐고 있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을까.


그런 날을 내가 당당하게 맞을 수 있나.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왜 나는 그것이 없는 삶을 생각해 두지 않고 있을까.

지금 용감한 척하는 것은 못내 불안한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일까.





4.7

섬에서의 휴가였다. 그래서 마실 나갔다.

육지에 있을 땐 차 막히는 금요일 저녁이나 마음먹은 주말에 작정하고 가야 하는 바닷가였는데

여긴 집에서 십 분만 가도 온통 미역 냄새나는 해변이다.


해결이 안 되는 작은 고민으로 길길거릴 땐 내가 지구에서 가장 힘들고 불쌍한 사람 같은데

찬바람 부는 바닷가에 서 있으니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밀려드는 흰파도, 그 앞에서 나는 물살에 떠다니는 텅 빈 소라껍데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도 단지 하늘 아래 그저 나약한 자연의 일부인데 왜 그렇게 손안에 움켜쥐고 대단한 고민 인양 전전긍긍한 모양새로 사는지


문득 반성문 쓰는 기분으로 한참을 서성이다 왔다.





4.11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다가 언덕배기에서 자연산 달래를 한 줌 캐왔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서인가 된장찌개에 넣으니 알싸하면서 짭짤한 듯한 새초롬한 그 맛이 썩 마음에 찬다.

섬이 주는 여유일까 더도 덜도 욕심 말고 저녁 한 끼 먹을 딱 그만큼만 베어 오면 그걸로 소박한 밥상이 풍요롭다.





4.13

하루의 1/3 이상을 머무는 곳,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 많고 똥 누러 갈 시간도 없이 시간에 쫓기고 여기 앉아 있는 시간은 늘 촉박하거나 뒷골이 당기거나 힘들거나 정신없거나 4가지 옵션 중 하나지만 그래도 내 자리가 좋다.


사무실 구석진 곳 단 몇 평의 공간이지만 이곳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자부심이 생기고 적금을 붓고 보험을 유지하고 주말을 손꼽고 탁상달력 다음장을 넘길 수 있으며 퇴근 시간을 기다릴 수 있다.


한치의 변화도 없이 늘 반복되는 일상이라며 지겨워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시간은 매일같이 머무르는 곳에서 지내고 늘 보는 사람들을 보고 하던 일을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하던 일을 쭉 하는 나 자신이다.

오늘 같은 똑같은 날들이 모여 나의 미래를 만든다.

어쩌면 나의 평범한 일상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아주아주 큰 선물이자 행운일지도 모른다.





4.27

"여보세요? 아가, 어린이집 갈 시간이야, 가방 메고 어서 나가~"

"응!"

(아직도 시계 볼 줄 모르는 작은 아이를 태울 유치원 차량이 올 시간이다.)


(일이 있어 아이를 집에 놓고 먼저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 창밖 산 아래에 있는 먼 우리 집, 그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현관 그곳만 뚫어져라 눈에 힘주고 본다.

지금쯤이면 핑크색 찍찍이 운동화를 신었겠지.

이제 현관문을 몸으로 밀며 열었을 거고 계단을 내려오고 아파트 현관문을 밀고 나오겠구나.


내가 상상한 정확한 타이밍에 현관에서 노란 점 하나가 툭 튀어나와 쫑쫑거리며 주차장에서 움직인다.

아침에 춥다고 노란색 잠바를 입혀줬지...

엄마 없이도 노란색 점하나는 살방살방 잘 걸어간다.


... 딱 거기까지만 보인다.

산과 나무에 가려 혼자 유치원 버스 기다리는 모습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노란 점하나 본 것으로 오늘도 안녕히 다녀올 것을 애써 믿으며 손에 안 잡히는 업무를 시작한다.


일하는 엄마와 사는 이유로 아이는 나날이 강해져 간다.

엄마 마음은 매일매일 무너진다.





5.14  (아이가 육지에서 중이염 수술을 하던 날)

간단한 수술이었는데도 아이가 마취에서 깰 때까지 한 달 전, 일 년 전에 혹시 내가 누굴 미워해서 이렇게 아이가 대신 벌 받는가 하는 소심한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아이가 크면서 아픈 건 당연한데도 그 원인이 나한테 있는 것만 같아 다시는 나쁜 생각 안 할게요 너무나도 뻔한 지키지 않을 다짐만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아이가 깨어나 엄마를 부를 때까지 젖은 눈으로 침대 곁에 머무른다.




7.13

섬은 밤 활동 시간이 없다. 낮은 그냥 낮이고 해 가지면 그냥 자는 시간이다.

근처에서 들리는 해병대 취침나팔소리에 섬은 적막해지고 내일 아침 배가 출항한다는 문자가 오기 전까지 섬은 잠들어 있다.


어떻게 여기서 사나 막막했던 생각들이 어느새 내 삶의 지나간 시간으로 채워져 있고

내일 다시 쓰는 재료가 된다.





8.27

"엄마, 먼저 친해지고 싶은 친구한테 다가가서요 같이 놀자고 말하세요. 그런데 그 친구가 싫다고 말하면요, 슬퍼하지 말고 아무도 없는데 가서 조용히 휴우~ 하고 숨을 크게 쉰 다음에요, 다시 가서 말하는 거예요.


나랑 같이 놀자고요 나도요 친구가 안 놀아줘서 속상한 적 많지만요, 이렇게 하면 금방 놀 수 있어요!"^^


엄마는 섬에서 친구가 없다고 짐짓 슬픈 척했더니 작은 딸이 상담해준다.

안 이뻐할 수가 없다. 그 작은 입에서 어찌 그런 말들이 종알 종알 쏟아질까





9.12

퇴근하니 아이가 없어졌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황달처럼 노오래 질 즈음 아이는 나타났고 개구리 잡느라 바빴단다...

자꾸 겅중겅중 뛰는 개구리 때문에 늦었단다. 세상에 날 잡아가쇼~ 가만있는 정신 나간 개구리가 어딨냔 말이다.

엄마가 기막히든 코막히든 아이는 일기 쓰고 자더라.





8.30

모처럼만에 직장 회식 참석했다.

애들을 놓고 갈 수가 없어 양해를 구하고 데리고 갔다

서로의 술잔이 오고 가는 회식자리에서 나는 된장국에 밥을 말고 고기를 굽고 열심히 아이들에게 먹였다.


오늘따라 아이들은 밥을 오래 먹고 고기를 계속 계속 달라한다.

굽기 바쁘게 고기는 사라지고 그 속도에 맞춰 얼큰한 소주가 오가는 회식도 무르익어간다.


배가 빵빵하도록 먹은 아이들은 드디어 밖에서 논다고 나간다.

나는 이제부터 밥 먹기 시작한다.

지금부터가 나는 회식이다.


하지만 이미 고기와 술로 배를 채운 동료들은 내가 왜 여태 안 먹었는지 모른다.

식은 된장국과 남긴 밥, 이미 딱딱해진 기름 칠갑 삼겹살로 대충 급하게 넘긴다.

소주라도 한잔 먹고 싶은데 회식은 이미 끝자락이다.


싱겁게 마신 어정쩡한 소주 3잔.

집에 오니 잠도 안 온다.






돌아보니 눈물도 웃음도 같이 있었던 그곳.

섬에서는 하루하루 온 마음으로 버텼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덧 아이들을 홀로 키운 지 만 3년이 지나고 있었다.

결혼생활에 힘들었던 시절, 무료법률 상담에서 아이들 양육권을 내가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아이가 어릴수록 엄마가 키우는 게 제일 좋지만, 지금까지의 양육환경을 봤을 때 아빠가 양육하면 월급도 많고 또 아이들을 봐주는 할머니와 고모들이 가까이 있으니 아빠한테 양육권을 주고 엄마에겐 면접교섭권을 줄 확률이 높을 겁니다.  아이들의 환경을 갑자기 바꿔버리면 아이에게도 좋지 않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맞는 말이었다.

시집가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뭐 그런 속담이 있다.

의미는 크게 다르겠지만 나에게 그 3년이 지나고 있었다.


남편에게 문자를 했다.

-이혼도 안된 상태니 당신은 여전히 자녀 부양의 의무가 있는 건 알고 있지? 양육비를 이번 달부터 보내-


남편에게 곧바로 시원한 답장이 왔다.

-또 돈 얘기야? 키우기 힘들면 애들 보내. 내가 키울 테니까. 당신보다 더 잘 키울 수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변호사 준비해. 법원에서 봐.


오랜 시간 만지작 거리고 있던 인내심을 꺼냈다.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응당 누렸어야 할 권리를 이제는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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