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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6. 2020

이혼소송, 그 진흙탕 싸움의 시작

이혼 전 이야기 #. 20

결혼생활을 했을 때 

나와 같이 1종 보통면허였던 남편은 어느 날 대형면허를 따겠다고 했다. 이론 공부를 시작하고 학원을 다니더니 대형면허를 따왔다. 나보다 면허가 더 상위라고 자랑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받아쳐 줬어야 했다.

미친놈

너 대형 딴다고 깝죽거릴 때 나는 니들 엄마 모시고 누나네 셔틀 다녔다.


남편이 이론 합격을 하고 쓸모가 없어 버린 문제집을 재활용 쓰레기장에 가서 다시 주워왔다. 퇴근하고 틈틈이 공부해서 이론을 합격하고 실기를 등록했다.


"오르막에서 멈췄다가 다시 출발해봐요."

무섭게 생긴 대형면허 실기강사님이 시키는 대로 한 번에 무리 없이 했다.


"됐어요, 짱구 엄마는 붙을 수 있어. 여기서 하는 거 보면 합격할지 안 할지 알 수가 있지."

"저기... 근데 왜 제가 짱구 엄마예요?"

"딱 보면 나오잖아. 하게 생겼잖아요, 고집 있고. 젊은 양반이 비싼 돈 주고 여기 놀러 왔겠어?"


먼지가 펄펄 나는 면허 연습장에 가서 힘껏 버스 핸들을 돌리고 또 돌렸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에어컨이 나오는 대기실이 아니라 라인 밖에서 앞사람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머릿속으로 핸들을 같이 돌리고 엑셀을 같이 밟았다.


한 번에 합격을 해서 남편에게 면허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나한테 지기 싫었는지 이번에는 지게차 면허를 따왔다.

지게차를 배우기엔 중장비 학원은 너무 비쌌다. 그땐 별거 중이라 돈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지게차를 빌려 시멘 바닥에 선을 그려놓고 혼자 연습했다. 눈치가 보여 초콜릿을 봉지째 갖다 주며 굽신굽신 지게차를 빌렸다.

초시계를 목에 걸고 매일매일 5초, 4초 시간 단축을 하며 입에 단내가 나도록 연습했다.


섬으로 들어오느라 그해엔 따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섬에서 지게차 면허를 땄다.

여세를 몰아 그다음 해엔 남편에겐 없는 굴삭기 면허도 따버렸다.


별거 중이라 건설기계 조종사 면허증을 남편 눈앞에 들이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남편이 출퇴근할 때 쓰던 우리 집 차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었다. 

남편은 나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차를 쓰겠다고 하는 문자를 무시했다. 남편이 술을 먹느라 차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 나 운 좋게(?) 차를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임신을 해서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할 때 특히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만삭의 배를 감싸 안고 남편을 데리러 늦은 밤 술집 근처에도 자주 나갔다.

남편은 내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택시 타면 집까지 만원 넘게 나올 텐데. 당신이 와주면 공짜고."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었던 내 성격에 밤 11시, 12시를 가리지 않고 남편을 데리러 가곤 했다. 배가 부를 대로 불러서 안전벨트를 하지 못하는데도 무거운 몸으로 계단을 내려와 남편을 데리러 갔다.


부부 사이가 나빠지자 데리러 나와달라는 전화도 없었지만 동시에 차를 좀 쓰겠다는 내 말에 응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사정사정하고 눈치를 봐가며 차를 얻어가야만 속이 시원했을까. 


수중에 악착같이 모으던 돈이 얼마 있었다.

작은 차를 한대 샀다. 일부러 남편 차 옆에 새 차를 보란 듯이 주차해 놨다.


아이들이 주차장에 있는 차가 엄마 차라고 알려줘서 남편도 시어머니도 내차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돈 주고 내가 샀으니 말할 필요도 상의할 필요도 없었다.

내 명의로 된 내 차에 한 번도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태우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쉽게 봤다. 나도 쉽게 대해주면 될 일이었다.

내가 아이들 없이는 어떤 짓도 하지 못할 거라는 것, 그리고 여전히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이 남편에겐 아주 좋은 미끼였을 것이다.




남편은 '돈 없으면 아이들 보내'라는 말 한마디면 내가 더 이상 양육비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번 써먹었는데 그게 먹히니 아마 영원히 쓸 수 있는 카드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혼 전이라도 법적으로 생활비를 요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좋게 말로 해서는 줄리 만무했다.

남편은 미웠던 아내만 기억했지, 그 여자가 혼자 작은 월급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결국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딸!~ 딸~ 아빠가 우리 딸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너도 해봐, 아빠 사랑한다고 어서~"

통화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했지만, 의무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남편과 별거를 하고 있었지만 서류상으로는 가족이었으면 했다.

남편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서류상으로 정리가 된 부모의 꼴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따로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할 수 있고, 남편과 연결돼있는 처지가 못내 싫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법적인 부부관계만큼은 놔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개월의 숙려기간이 끝난 뒤 다시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 남편이 공증에 적힌 금전적인 부분을 해결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이혼 접수는 무효로 끝나버렸다.


말 그대로 협의이혼을 하겠다는 약속이었으므로 협의사항을 지키지 않은 남편으로 인해 이혼을 확정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양육비를 달라고 하면 당연히 안 주겠지. 그럼 소송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혼소송을 해야만 법적으로 양육비를 받아낼 수 있겠지. 결국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이혼을 각오해야겠구나...'


그렇게 남편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뒤통수라면 백번이라도 치고 싶지만 정정당당하게 법으로 심판을 받자고 생각했다.


유치하게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 저주를 퍼부을 필요도 없었다.


변호사 준비해. 법원에서 봐 그럼

이혼 전문 변호사를 검색했다. 이름이 나 있는 변호사는 수임료가 백만 원 이상 비쌌다.

내가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확신은 했지만 남편도 순순히 져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상금으로 아껴뒀던 돈을 긁어모으고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인터넷에 이혼 변호사 수임료에 대해 검색을 하니 '그 돈이면 차라리 생활비로 한 달을 더 쓰거나 아이들 복지를 위해 쓰고 서로 원만히 합의하는 게 낫다.'라는 속 편한 충고도 있었다.

나도 안다. 

말로는 합의가 안되니 결국 아이들의 몫을 되찾으려면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휴가를 내서 섬에서 서울까지 변호사를 만나러 갔다.

이혼 파탄 사유에 대한 위자료는 많이 신청해봤자 3천만 원이었고 그것도 희망사항이지 그만큼 다 받진 못할 거라고 현실적으로 말해주었다.


그 세월에 대한 대가 아니, 내가 흘린 눈물의 값이 3천만 원도 안된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뭐, 수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법의 해석은 냉정했다.

너도 억울하지만 상대방도 억울하고 반격을 할 것이며 냉정하고 침착하게 사실에 근거해서만 반박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집에서 본격적으로 소송에 첨부할 서류 등을 찾기 시작했다.

3년 전 다녀왔던 경찰서와 응급실, 외래진료실의 폭행과 관련된 기록들과

경찰관님, 남편의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말에 핏기 없는 얼굴로 지구대를 찾아갔다. 며칠 전 어느 아파트에서 신고된 사건 확인서를 발급받고 싶다고 했다.
 "아, 며칠 전 밤에 지구대 오신 분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당직을 섰던 경찰관이 근무 중이었다. 출력해서 주며 내게 말했다.
 "당장 이혼 그런 거 안 하더라도 증거는 모아놓고 계세요. 식구 때리는 거요, 한 번이 어렵지 상습범 됩니다. 뭐 남편 되시는 분이라 그렇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혼이 좀 나야 돼요."

외래진료를 갔다.
며칠 전 응급실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담당의사가 별다른 말없이 소견서를 써주었다.
전치 2주를 써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것저것 그날의 기억들을 파일에 모아두었다. 당장 뭘 할 건 아니었다.


언니에게 울면서 썼던 이메일, 남편의 카드 사용 기록, 주고받았던 문자메시지, 날짜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내 일기.

뭐든 긁어서 다 모았다. 


어떻게든 내 결혼생활이 불행했고 힘들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소위 말하는 승자도 패자도 없을 진흙탕 싸움에 돌입했다.


남편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몫을 이제서라도 받아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 반드시 한 번에 이겨야 했다. 


그럴수록 내 손에서 써지는 소장은 냉정해졌고 차가워졌다. 

남편에 대한, 상간녀에 대한, 시가에 대한 응징보다 왜 우리 아이들을 내가 키워야 하며 양육비와 위자료를 지금에서야 달라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득해야 했다.


남편은 설마설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 내가 데리고 있었고, 남편은 그동안 단 한 푼의 양육비도 주지 않고 있었다.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아빠를 보여주기 위해 수없이 섬을 드나들었던 기록까지도 나에게 유리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을 보여주지 않거나 험담하지도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소송 초안으로 올릴 그간의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써서 메일로 보내라고 했다.

이틀을 꼬박 작가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일단 살기 위해 일부러 잊고자 꽁꽁 묵혀뒀던 기억들을 다시 꺼냈다.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고 가슴이 벌렁거려 청심환을 마셔가며 작성을 잠시 중단을 하기도 했다.


자료를 작성하면 할수록 옛 기억이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이것을 계속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쓰다가 쓰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놀러 나가고 없는 시간에 두꺼운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악을 쓰면서 울다가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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