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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4. 2020

1,125일 동안의 피난처, 섬

이혼 전 이야기 #.18


"엄마 거기에도 홈플러스랑 애슐리 있지?"

"그럼~ 거기에도 있지. 모자 다시 쓰자, 춥다 바람이..."


아이의 눈과 코만 나오도록 모자를 꾸욱 당겨서 씌웠다.

1월의 매서운 바람이 부둣가에 서 있는 아이들 뺨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숨을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섬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지 혼자 다짐을 했다. 

나를 아는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한숨 자, 아가. 일어나면 도착해있을 거야."


얼마나 갔을까. 사방이 바닷물밖에 없던 망망대에서 저 멀리 작은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육지에서 보는 태양과는 다른 해가 떠있는 듯한 낯섦. 아이들을 데리고 섬에 도착해 한 발을 내디뎠다.

살면서 잘 맡을 일이 없었던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이삿짐차는 빌라 앞에 짐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몇 안 되는 직장 사람들이 맨손으로 이사를 도와주었다. 





섬에서 눈치를 많이 보며 일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겨울에도 브라가 젖도록 안으로 밖으로 뛰어다녔다.

암이 자라 절제해버리고 없는 갑상선의 기능을 약으로 대신하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뛰다가 몸이 꺼지듯 주저앉다가 호흡이 가빠지기도 했다.


직장 건강검진 때에도 약 먹는 것을 숨겼다. 비정규직을 써도 건강한 비정규직을 쓰겠지 하는 걱정이 있어서였다.


갑상선암은 원인이 정확히 밝혀진 건 없지만, 스트레스로 미루어 짐작하는 병이라고 했더니

남편은

"그 암이 내 탓이냐? 당신이 성격이 예민하고 지랄 맞으니까 생긴 거지."

"우울증이 뭐 대단한 거냐. 진짜 삶이 편하거나 할 일 없는 여자들이 걸리는 거지."

라고 친절하게 발병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피곤이란 것은 늘 숨처럼 달고 다니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제가 할게요. 이것도 제가 해볼게요. 할 수 있어요."

피곤함을 숨겨야 했다. 그야말로 만능이 돼야 했다. 


연고가 없는 곳이니 친구가 없었다. 직장동료 말고는 어른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퇴근하여 집으로 가서 저녁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했다. 

직장 회식이 있을 때면 아직 어린아이들을 떼놓고 갈 수가 없어 데려가기도 했다.

이내 눈치가 보여 어느 순간부터는 참석하지 못했다.


저녁 8시가 되기도 전에 불이 다 꺼지는 섬에서는 밤이 참 길었다. 

아이들은 9시만 되면 자는 습관을 들였다. 

많이 자면 더 빨리 커서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럼 덜 미안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잠들면 유령처럼 일어나 살금살금 부엌으로 나왔다.

중고로 샀던 그 식탁에 앉아,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을 표정 없이 응시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나는 밤도 있었고, 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아이들의 무게가 느껴져 밤새도록 두려움이 나를 괴롭히는 날도 있었다.


식탁에서 엎드려 졸 때면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는 꿈을  꾸기도 했고

시어머니가 수갑을 차고 나오는 꿈도 꾸었다.

날이 갈수록 심장이 뛰는 소리가 거세졌다.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육지로 휴가를 나가는 동료에게 부탁을 해 액상으로 되어있는 청심환 20병을 부탁했다.

면접을 잘 보려고 예전에 먹었던 것이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나 유난히 힘든 출근시간에도 마셨다.



하루는 출근을 해서 인사를 하니 관리자가 나를 불렀다.

얼굴을 빤히 보더니 당장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극심한 탈수 증상이라고 했다. 

"저는 물도 잘 마시는데요..."

"탈수가 물 먹는다고 안 생기는 거 아니에요."

"... 링거를 좀 빨리 들어가게 놔주세요."

부랴부랴 직장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열이 펄펄 나는 밤에는 급한 대로 아이를 둘러업고 해병대 의무실로 뛰어갔다.

폭설이 내렸을 때는 세대마다 대표로 나온 아빠들 사이에서 말없이 눈을 치웠다.

걸핏하면 단수가 되었다. 


그나마도 물이 나오는 날에는 시커먼 흙물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먹일 생수를 구멍가게에서 사다 날랐다.

렌탈했던 비데는 소모품 교체를 하러 들어올 수 없으니 위약금 없이 렌탈계약을 철회해 주겠다고 했다.


4개월에 한 번씩 비데 필터와 나머지 소모품을 택배로 받아서 직접 교체를 하겠다고 했다.

작동이 안 되면 회로기판을 받아 비데를 분해한 후 교체했다.

누구에게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 생일엔 동네에 딱 하나 있는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야 했다.

아이가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 해서 식당에 가면, 배가 며칠 들어오지 못해 재료가 떨어졌다고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태풍이 오거나 파도가 높을 때면 배가 며칠씩 뜨지 않았다. 섬은 택배도 끊기고 생필품마저 고갈되어 갔다.


아이에게 먹일 우유 하나를 치즈 하나를 더 사겠다고 동네 마트에서 물건 하나 가지고 싸웠다.

내가 밖에서 유일하게 별나게 구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그곳 생활이 즐거웠을까.

배터에 놀러 가면 아이들은 저 멀리 육지로 나가는 배에 탄 관광객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일부러라도 씩씩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육지라면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았을 것이 분명했겠지만, 섬에는 학원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숙제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내가 강제적으로 시키는 것은 일기 쓰기였다.


아이들은 개구리알을 건지고, 올챙이를 잡고, 메뚜기를 잡고, 잠자리를 쫓아다니고, 바위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아빠가 있는 친구들을 따라가 얕은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입가가 새까맣도록 자장면을 얻어먹고 왔다.

옆집 아저씨에게 두 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일기에 썼다.

육지에 나가려고 했는데 파도가 높아 배가 뜨지 않는 날에는 울면서 배터에서 돌아왔다고 일기에 썼다.


섬에서 3년을 넘게 살았다.

2년을 지낸 뒤 나가려고 했지만 아무도 이곳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편은 한 번도 아이들을 보러 배 타고 들어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직장 때문에 바빠서, 휴가를 낼 수 없어서 못 온다고 했다.

시들어가는 꽃처럼 아빠를 오래 못 보는 아이들이 낙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한 달에 한번 있는 휴가 때마다 또다시 파도를 해치고 육지로 나와 아이들을 아빠에게 데려다주었다.

배를 타고 5시간을 갔다. 

3년을 반복했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고 오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았다.


뱃삯이 포함된 탓에 섬은 싱싱한 야채와 고기가 귀했다. 있어도 값이 비쌌다.

아이 치과치료차 육지에 나갔다가 들어오던 날,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뷔페에 들르기로 했다.

섬에서 못 먹었던 음식들을 원 없이 실컷 먹이고 싶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여객선 터미널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할 듯했다.

아이들에게 재촉을 했다. 

당분간은 육지에 나올 수가 없으니 지금 많이 먹어두라고 했다.

섬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뷔페 음식을 보니 아이들도 나도 욕심이 났었나 보다.


급하게 이것저것 먹이고 나도 먹었다.

브레이크를 요란하게 밟아가며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해 배표를 끊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그날은 파도가 높았던 날이었다.

너울성 파도는 두통과 함께 뱃멀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먼바다로 나가자 본격적인 너울성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그 작은 위에 이것저것 엄마가 시키는 대로 급하게 넣었으니 소화가 될 시간도 없이 얼마나 부대꼈을까.


평소에도 멀미가 심한 큰아이가 토를 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토를 했다.

멀미가 잘 없던 작은 아이도 그 냄새에 덩달아 토를 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에게 봉지를 받쳐주며 번갈아가며 닦아주어야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무릎에 눕히고 제발 잠들게 해달라고 수백 번 기도를 했다.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나를 원망하며 큰아이는 울었다.

큰아이를 안으면 작은 아이가 또 울었다.



속이 비워진 아이들이 잠잠 해질 즈음 어지럽던 나도 한계가 왔다.

아이들이 엄마를 보고 또 토할까 봐 좌석 밑에 기어들어가 엎드려 토했다.

급하게 먹은 비싼 육지 음식이 보람도 없이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좌석 밑에 엎드려있으니 배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매캐한 기름 냄새도 올라왔다.


... 갑자기 서러웠다.

이 모든 게 너무 서러웠다. 

애들한테 맛있는 음식도 급하게 먹여야 하고 다 게워내게 만드는 파도가,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엄마는 왜 이제까지 한 번도 안 울어요?


왜? 엄마는 안 우는 것 같아?


네. 나는 엄마 우는 거 못 봤는데요, 엄마는 발가락 찧어도 아이고야~이렇게만 하지 안 울잖아요.

나는요 꾹 참으려고 해도 주사 맞을 때나 치과 가면 울거든요.


그래? 엄마는 왜 안 울까?


... 그냥. 어른이라서 창피할까 봐 안 우는 것 같아요.




아이가 예전에 심각하게 물어보았던 귀여운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토하면서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그렇게 바닥에서 울다가 파도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잘 자고 있나 고개를 들어 좌석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안 우는 엄마를 연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 우는 거 그때 처음 봤어요, 나."

한참 지난 후 아이가 말했다.


멀미가 슬퍼서 운거야 아가. 


엄마 참 재미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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