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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1. 2020

"양육비? 자꾸 돈 돈 할 거면 애들 내놔."

이혼 전 이야기 #.16

이혼 접수를 하고 별거를 시작하였으나 3개월의 숙려기간 뒤 이혼을 확정을 짓기 전까진 여전히 서류상 부부였다.

아이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매주 한 번이 아니라 그 이상도 원하는 날엔 언제든지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하겠다고 남편에게 말해둔 터였다.


결혼생활 중 나에게 가장 큰 벌을 내릴 수 있는 것을 꼽으라면 '아이들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남편도 그런 끔찍한 벌을 받도록,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날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접었다.

아이들은 내 소유물도 아니었고 한쪽 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할 그 어떤 권리도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이혼한 사람은 나였지 아이들이 아니었다.

시가와 단절하고 결혼생활을 그만둔 것은 나였지 아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처럼 남편과의 관계가 힘든 친구가 있었다. 아이에게 미안해 이혼은 차마 하지 못해지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자 오직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것 같았다.

그게 느껴졌다. 내가 그랬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말할 곳도 없고 외롭다 보면 결국 아이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어 진다.

그렇게라도 내 마음의 고통을 보상받고 싶어 한다. 그 순간 연약하고 힘이 없는 아이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다.


엄마가 내뱉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에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다. 들어주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싫다는 내색도 못하고 들어준다. 

듣는 척을 한다.


엄마로부터 세뇌당한 아빠에 대한 미운 마음이지만 들을수록 괴롭다. 하지만 그만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엄마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아빠를 미워할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 주지는 마

남편과의 사이를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는 나중에 말했다. 그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 작은 아이에게 내 감정을 다 쏟아붓고 위로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그래 친구야. 남편이랑 안 좋은 건 우리지, 아이가 아니야. 아이에게 아빠는 태산 같은 존재일 거야.






내 아이들은 엄마가 왜 자기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지 몰랐다. 사실대로 이야기해주기엔 내가 너무 겁이 났다. 아이들이 8살 6살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엄마 직장이 사무실을 이 동네로 옮겨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할머니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드셔서 너희 둘을 돌봐주시는 게 힘들어지셨어."

라고 얼버무렸다.

남편이 아이들을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아빠 이야기를 하면 문자로 물어본 뒤 내가 데려다 주기도 했다.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 급한 게 없었던 걸까.

그렇게 법적인 관계만 유지된 채 남편보다 적은 월급으로 누구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키웠다.


월급도 나보다 적은 주제에 애들을 키운다고 데려가더니, 그렇게 돈 돈 할 거면 애들 보내

애초에 양육비 이야기를 꺼내면 남편의 대답은 그렇게 세팅이 되어 있었다.

매달 나가는 주차비용, 아이들 둘 학비, 생활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직장에서 언제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하루하루가 고민스러웠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내 손으로 일일이 고쳐서 전세 살고 있었던 달동네 집에서 4개월 정도를 살았을 즈음 직장에서 도서지역 파견근무 희망자를 모집한다고 했다. 뱃길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섬이었다. 열악한 주변 환경과 보건소 하나에 의지하는 여건상 사람들이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해서 순번제로 보내야 하는 곳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남편과 별거 중이었지만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다.

남편은 우리 회사의 인사책임자를 찾아와 '시어머니를 구박했고 결혼생활도 불성실했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리더니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돌아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아직 이혼한 상태도 아니었고, 이혼할 예정이라고 밝힐 생각도 없었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속이 시커멓게 썩어가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가지 않으려고 하는 섬이라....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변 시선으로부터 가까이 사는 남보다 못한 남편으로부터 아직 마음속에 치유되지 못한 결혼생활의 억울함과 분노로부터 나는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섬에 가면 지금보다 생활비도 덜 들 거란 현실적인 계산도 해보았다. 


섬에 지원해서 다녀온다면 분명 인사고과에 유리한 가산점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근무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곳에서 한두 달도 아닌 몇 년을 갇혀 지내는 것은 각오해야 되는 일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부장님을 찾아갔다. 마른침이 나도 모르게 꿀꺽 넘어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거기로 보내주세요. 애들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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