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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02. 2020

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다

이혼 전 이야기 #.17

섬을 자진해서 가겠다는 말에 부장님은 나의 관리자였던 과장님에게 직원과 면담을 좀 해보라고 하신 모양이었다.

위험한 곳이기도 하고, 여직원을 보낸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난감하신 듯했다.

과장님이 나를 조용히 호출하셨다.




남편에게 폭행당해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갔다 왔던 다음날 실핏줄이 터진 눈과 멍이 든 뺨을 화장으로 대충 가리고 출근을 했다. 아마 내 직장에도 경찰서에서 연락이 올지도 몰랐다. 과장님께는 미리 말을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이혼 전 이야기 #.10 "경찰관님, 남편의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토끼 같은 애들이 둘이야, 남편도 돈 잘 벌어,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자네는 참 대단하네."

평소에 나를 칭찬하셨던 과장님께 비참했던 지난밤의 가정사를 꺼내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과장님, 오늘 혹시 경찰서에서 전화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

"... 몸은 괜찮나. 허어... 얼굴이 못쓰게 됬구만."


직원들이 지나가다 혹시나 듣게 될까 봐 과장실 문을 닫고 소파에 앉으라고 하셨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 누가 잘못한 건지 좀 참을 순 없었는지 이런 훈계들은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자네... 괜찮나?"



......

순간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훅 올라왔다.

실핏줄이 터진 눈시울이 따갑게 뜨거워 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아직 울어서는 안 되었다. 아직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무너질 수도 없었다.


"...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게. 나도 비밀을 지킬 테니 힘들겠지만 동료들한테는 말하지 말게. 여직원이라 소문이 나도 이상하게 금방 퍼져버리는 거 자네도 알지 않나."


남편과 별거를 하기 위해 집을 알아봐야 했을 때 과장님은 외근을 보낸다며 나를 밖으로 보내주셨다.

퇴근을 하고 나면 집을 보러 다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장님 덕분에 며칠을 집을 구하러 다닐 수 있었고 마침내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회사에 비밀로 한채 혼자 이사를 하고 얼마 후 과장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퇴근 후 혼자 버스를 타고 달동네를 찾아 올라오셨다.

좁은 현관에 들어서며 온통 검은 갈색의 나무로 되어있는 집안 내부를 휙 둘러보던 과장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데리고 나가세. 밥 먹어야지."


집 근처에 있는 갈빗집을 갔다. 익힌 고기를 작게 잘라주어야만 오물거리며 먹을 수 있는 아직 한참 어린아이들을 복잡한 얼굴로 보고 계셨다. 아이들에게 양껏 고기를 먹이고 이제 집으로 올라가 보라며 오만 원짜리 지폐를 아이들에게 쥐어주셨다.


"괜찮습니다. 과장님 안 주셔도 돼요."

"자네한테 주는 거 아니야. 우리 이쁜 조카들한테 주는 것이지. 엄마 주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어, 알았지?"

손바닥보다 훨씬 큰 지폐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과장님은 씩 웃으시더니 곧장 뒤돌아 가셨다.

총총걸음으로 내리막을 내려가셨다.




그랬던 과장님과 마주 앉아 있었다.

"꼭 가야겠나? 거긴 윗분들도 여직원을 보내긴 좀 망설여지는 곳이야. 내가 관리 자니까 나한테 한번 이야기해보라는데... 괜찮겠나?"


"네, 과장님. 아시잖아요, 저는 비정규직입니다. 가서 인사고과 점수라도 따야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보내주십시오, 추천서를 써주세요."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만들어 사유서를 쓰는 파견지에, 나는 어떻게든 가보려고 추천서를 써달라 부탁을 드려야 했다. 


3개월을 인사팀에 졸랐다. 결국 남자들만의 근무지였던 그곳에 회사 내 최초로 여직원이 파견을 가게 되었다.




두려웠다.

막막했다.

겨우 난 33살이었다.

엄마가 강한 건 맞는데, 나는 엄마 이기전에 겁 많은 한 여자였다.


아이들을 오로지 내 손으로 키워내기 위해,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통보받지 않기 위해, 안정된 월급을 확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것이 고립된 섬이라 할지라도 나는 가야 했다.


섬에 있는 나를 잘라보라지, 내가 나가면 누구라도 여기 끌려와야 될걸?

억지로라도 용기를 내봐야 했다. 인사고과에 미쳐서 애들 고생시키려고 거기까지 간다는 수군거림이 들려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섬으로 이사를 또 해야 한다.

아이가 이제 겨우 적응하며 다니던 어린이집과 4개월 만에 또 작별을 해야 했다.

"오늘이 마지막 등원이네요. 어머니, 건강하시고요. 그렇게 멀리까지 가셔서 어떡해요?"

퇴근 후 아이를 찾으러 간 어린이집 현관에서, 별스럽지도 않은 인사에 갑자기 눈물이 밑도 끝도 없이 터졌다.


그렇게 먼 곳으로 또 정처 없이 가야 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누구와 상의할 것도 없이 나 혼자 조용히 정착할 곳을 찾아야 했고 준비해야 했다. 

빈손이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한가정 부모이자 가장이라고 나 좀 배려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게요 선생님, 그러게요...'

아이를 건네주시며 밝게 인사하던 어린이집 선생님이 소리도 못 내고 눈물 줄기를 뿜어내는 내 얼굴에 머쓱해하셨다.


이미 반쯤은 터져 나온 울음을 도로 집어넣느라 선생님께 대답도 못하고 90도 인사를 한 후 아이를 둘러업고 나왔다. 

다 큰 애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고 꾹꾹 울면서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동네 과일가게를 지나고 김밥집을 지나면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등에 업힌 작은 아이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조용히 엄마 목을 감싸고 있었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동안 학교만 2군데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이번 이사로 또 학교를 옮겨야 할 판이었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자주 창밖을 멍하니 봐요. 먼저 시키지 않으면 말수도 없는 편이고요. 1학년 치고는 굉장히 어른 같아요."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하고 나올 때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지 않고는 불덩이 같은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명치가 먹먹하도록 쳐서 그 통증이 더 커져야만 답답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말수가 점점 줄어드는 아이를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녹아서 없어질 때까지 지켜봐야 하는 것, 

아파하는 아이의 고통을 곁에서 고스란히 느끼며 기다려줘야 하는 것, 

그러면서 어떻게든 키워내야 하는 것.

그것이 이혼을 선택한 내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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