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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29. 2020

아이의 공황장애 앞에서

이혼 후 이야기 #. 17

엄마 갑갑해 숨이 안 쉬어져. 나 좀 데리러 와줘

퇴근해서 밥 먹다 말고 자동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뛰어나갔다.

미술학원에 있던 큰아이가 전화를 했다.

잠잠했던 증상이 다시 심해졌다.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또 갑갑해지고 우울해질까 봐 아이를 데리고 한밤중에 드라이브를 했다. 

무작정 차를 몰았다. 

어디든 그 어디든, 내 아이 가슴속을 좀 시원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밤새도록 운전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아이가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두통약을 먹으면 없어지는 잠깐의 통증인 줄 알았는데 아이는 점점 힘들어했다.


철사로 머리를 꽁꽁 묶어놓는 느낌이야

아이는 혼자 더는 어쩔 수 없을 때 나에게 말했다.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학업 스트레스에서 오는 가벼운 두통인 줄 알았다.

한의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했다. 특별한 소견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아프다고 했다.

학교에서 집에서 머리가 아플 때마다 핸드폰에 적어 놓은 두통의 증상은 점점 강도도 세지고 주기도 빨리 다가오는 듯했다.


"언제부터 그런 건데?"

"중1 때부터."

"3년 전부터 아팠는데 왜 말 안 했어?"

"그냥... 이러다 말 줄 알았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닮아 미련한 건지 아이는 불편한 느낌이 꽤 오래갔을 텐데 그동안 말을 않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지나 중학교 입학.

아이에게는 많은 사건과 변화들이 있었다.


엄마 따라 주거지를 옮기느라 또 학교를 옮겼고 아빠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과 곧 아기를 낳는다는 말을 듣고 장문의 메시지로 아빠를 설득하고 원망하던 시기였다.


교육열이 높은 도시로 이사한 후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원하는 과외를 스스로 그만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시켜줬다.


"엄마가 볼 땐 이제 수학은 더 해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만 스트레스받잖아. 수학학자 될 거 아닌데, 그냥 과외비로 너 배우고 싶은 거 배워. 그게 낫지 않을까?"

"수학 몰라도 돼. 마트 가서도 기계가 알아서 다 계산해줘."


아이는 나름 최선을 다해보다가 미련 없이 수학 과외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미술이 하고 싶다고 했다. 미술학원에 등록하던 날 원장 선생님께 말했다.


"미술 입시전문 학원이지만 우리 아이는 그냥 미술이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입시생들처럼 빡빡하게 가르치지 않으셔도 돼요."


수학 과외 한 시간도 힘들어하던 아이가 미술학원에서는 4시간 넘게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집에 와서 보여주는 그림의 기초를 보고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면 더 으쓱해했다.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성적? 점수? 살아보니 그거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야. 학교 다닐 동안 친구 많이 안 사귀어도 되니까 정말 너랑 마음이 잘 맞는 친구 하나만 깊게 사귀어도 돼. 그리고 영어 수학 학원 다닐 시간에 네가 배우고 싶은 거, 해보고 싶은 거 그런 거 배워."


늘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내 품에 있는 시간들만이라도 진심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작은 아이 영수학원은 9시에 끝났다.

큰 아이 미술학원은 밤 10시에 끝났다.

퇴근하고 김밥이나 빵으로 저녁을 차 안에서 해결하고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렸다.


작은 아이가 나오면 큰 아이 미술학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다.


발이 시리고 졸음이 쏟아졌다. 아이들과 함께 10시가 훌쩍 넘어서 들어왔다.

그래도 아이는 공부 말고 미술에 흥미를 느껴가는 듯했다.

디자인 쪽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큰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철분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혈액검사도 받고 동네 병원 이곳저곳을 다니며 진료를 받았지만 결국 큰 병원을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대학병원을 예약했다.


소아청소년과를 거쳐 신경과를 거쳐 정신건강의학과까지 갔다.

각종 검사와 뇌 MRI를 찍고 면담을 했다.


의학적으로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다고 했다.

심리적인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심리검사를 위해 검사실에 보내 놓고 병원 복도 의자 한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 선생님이

공황장애라고 했다.

우울증에 불안증세가 심하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발을 자주 다쳤었다.

깁스는 다반사였고, 발을 자주 삐끗했으며 발등이 찢어져 꼬매기도 하고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이 발을 다치면 매일 아침 차에 태워 등교를 시켰다.

어릴 땐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아이도 불편했겠지만, 나만 잠깐 힘들면 될 일이었다.

나만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일상생활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이번에는 마음이 아프단다.

내가 업고 다니며 통증을 줄여줄 수도

밤새 물수건으로 열을 내려줄 수도 없었다.


...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막막했다.

이번 역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아이가 진료를 받는 동안 병원 로비에 있는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릴 때 이후로 소원 같은 건 빌어보지 않았지만 이번 딱 한 번은 하나님 찬스를 쓸까.

하나님한테 어서 낫게 해달라고 떼를 써볼까...


아이를 데리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녔다.

상담을 하고 약을 타고 경과를 지켜봤다.


직장에 자주 휴가를 냈다.

눈치가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새끼가 아프다고 한다.

그것도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눈치가 보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아이를 진료실로 들여보내고 나면 대기하는 환자들 사이에 앉아서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이가 나오기 전에 얼른 눈물을 닦았다.


발을 다치면 조심 좀 하지 그랬냐고, 덜렁대는 딸을 나무랐다.

발을 또 삐끗해오면 잘 안 보고 다니냐고 핀잔을 줬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니 할 말이 없었다.


왜 아픈지 알 것 같아서였다.


아이는 집에서 자주 누워있었다.

학교에서 두통이 심해질 때면 책상에 엎드려있는다고 했다



우리 딸, 공항 가고 싶어서 생기는 병이 났구먼, 공황장애.^^

실없는 농담만 건넬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는

갑갑하다고 느껴지면 한자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나와 신경전을 벌일 때면 더 아파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와 부딪힐라치면 조용히 집을 나왔다.

바람을 쐬거나 차 안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도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가 예민해지니 작은 아이도 덩달아 말수가 없어졌다.

엄마와 언니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작은 아이에게 미안했다.



상담치료를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은 아이가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엄마로서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아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엄마로 곁에 묵묵히 있는 것 밖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는 선택이나 대답이 느리다.

급한 내 성격과는 또 다른 성향이었다.

이제는 안다.

생각이 많기에 그만큼 신중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느라 단지 말이 늦게 나온다는 것을.


엄마에게 반항하느라 대답을 늦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


아파도 내 딸이다.

공황장애가 있어도 내 딸이다.

나와 싸워도 내 딸이고 말을 안 들어도 내 딸이다.


무슨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든 변함이 없는 사실은 금쪽같은 내 딸이라는 것이다.


같이 가기로 했다.

우울증이든 불안장애든 내가 곁에서 함께 가겠다고.


딸. 

언제든 와서 기대어도 좋아. 

대신 약속하자. 

엄마가 안 보이는 곳에서도 엄마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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