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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Feb 10. 2021

이혼하고 나니 명절이 좋아졌다

이혼 후 이야기 #. 50





알림이 울리기도전에

지난밤부터 오래 머물지 않은 잠에서 희미하게 깬다.



'알람 울리려면 10분 정도 남았겠구나...'


어스름하지도 않고 완전히 깜깜한 새벽이 아직 창문에 새카맣게 잠들어 있다.

1인용 내 침대에서 더 이상 이불과 비비적거릴 수 없을 즈음 핸드폰이 울린다.


화면을 밀어서 알람을 해제한다.

울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알람 3개도 미리 해제한다.


'어차피 첫 번째 알람 때 일어날 건데, 이제 하나만 맞출까...'


하다가도 결국 나를 못 믿어 자기 전에 알람 4개를 설정해두고 잔다.


손만 뻗으면 잡히는 솜 조끼를 어둠 속에서 입는다.


일어나 불을 켜고

뻑뻑거리며 잘 돌아가지 않는 눈에 안약을 한 방울씩 넣는다.

이 불 한 장, 베개 하나뿐인 침대를 정리한다.


책상 앞에 앉아 혈압을 재고 기록한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도 고혈압 환자이다.

얼마 전 병원에 갔더니

'고혈압 직전의 경계선에 있으니 6개월 정도 혈압체크를 해보고 약을 드실지 판단하시죠.'

라고 의사 선생님이 권했다.



일기장을 펴고 펜 뚜껑을 연다.

날짜를 적고 어제 있었던 일들과 오늘 해야 하는 일들,

그리고 내 마음을 적어 넣는다.


원망과 자책, 우울한 감정을 콧물을 들이마시며 쏟아내던 예전의 일기와는 다른 일기장.

끝없이 끝없이 나를 격려하고 감사함을 찾는 글을 쓴다.

그리고 말미에는 미래의 내 모습을 적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흐뭇하다.






출근하기 전에 밥을 해둔다.

그 전날 밥이 남아있으면 운 좋게 밥을 안 해도 되는 아침이다.

방학중인 아이들과 일요일에 한번 장을 같이 봐서 냉장고를 채워두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알아서 해 먹는다.



"엄마, 옛날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밥 해가지고 김에 싸서 입에 넣어줬잖아. 딸랑 김하나로 아침밥을 차려줬어."

그랬지...

그땐 위생장갑을 끼고 급하게 김에다 밥을 싸서 접시에 놓아주었다.


출근 준비에 바빴지만 밥 말고 빵이나 우유 한잔으로 아이들 아침을 주고 싶진 않았다.

시간이 될 땐 직접 삼각김밥을 만들기도 하고 볶음밥이나 미역국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김에 싼 밥만 기억하나 보다.


김이 눅눅해지면 맛이 없을까 봐 아이들이 오물조물 씹어 삼키는 타이밍을 봐가며 접시에 올려주었다.

뜨거운 밥을 움켜 왼손 바닥이 화끈거렸다.



표현에 거침이 없는 사춘기 아이들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엄마가 날로 먹었다'라고 표현한다.

꼭 그런 날만 있었던 건 아닌데 아이들은 용케도 잊어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을 한다.


김에 싼 밥이 아침으로 나왔던 날들을 잊지 않았다면 삼십 대 초반이었던 그 당시의 엄마표정도 아이들이 기억할까. 혹시 우울했던 엄마 얼굴도 같이 기억할까...



그땐 비정규직이었을 때였다.

혼자 아이 둘을 키우기 시작했던 날들이었다.

출근해서 잘 보여야 했다.

늘 긴장이 되었다.


출근 전부터 열이 이유 없이 펄펄 나는데도 직장에 출근해 병원에 간다는 소리를 못했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 둘을 '티 내지 않고 혼자 키우는 상황'과 내 아픈 것은 별개여야 했다.

하지만 집을 나서면 모든 상황이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움츠러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이혼녀라고 부르지 않는데도

들키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다.

일을 나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동네로 이사 가든 이웃들과 왕래를 하지 않았다.


아파트 아기 엄마들 몇 명이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들 눈에 띄지 않거나 있는지 없는지 모를 존재감이 없는 이웃으로 지내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님은 어떻게 남편분 만나셨어요? 결혼 전에 많이 사귀어보셨어요?

우리 부서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이혼했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아직 듣지 못한 후배가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나? 나는 한 사람 만나서 일찍 결혼했어. 연애 같은 거 몰라. 넌 많이 만나봐. 그래야 사람 보는 눈이 생겨."


애인과 열심히 연애 중인 후배에게 해줄 조언이 아직은 없다.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이혼해야 하는 타이밍.... 정도랄까?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술을 좋아하는 동료들은 서로 술 약속을 잡는다.

어쩌다가 '너도 같이 자리할래?'라고 예의상 물어오지만 그들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다.

그저 싱긋 웃어줄 뿐이다.



워킹맘은 저녁 약속을 잡거나 퇴근 후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면 아이들이 2순위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슬프게 알고 있다.


일을 하는 것도 미안한데 퇴근 이후 엄마의 자아실현을 위해 시간을 또 가진다는 것은 여전히 개운치 않은 일이다.


한때는 남자들과 똑같이 일하는데도 정체되어있고 고립된 내가 싫어 영어학원에 운동까지 스케줄을 잡아 몸이 지치도록 다닌 적이 있었다.


성취감도 있고 재미있었지만 아이들 고스란히 <엄마 없는 시간> 안에 남겨졌다.




아이가 어느 날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엄마가 늦게 오는 저녁시간이 너무 싫어. 우리만 집에 있으니까...'

그 한마디에 학원을 그만뒀다. 나를 대신해 부모의 자리를 채워줄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저녁을 먹고 부엌을 정리한 뒤 앞치마를 벗으며 TV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가벼운 잔소리를 날린다.


방으로 들어와 익숙한 내 책상에 앉는다.


읽다만 책을 펼쳤다.

가계부도 꺼낸다.

낮에 답장하지 못했던 급하지 않은 메시지에 답장을 한다.





이혼을 했고 이 집에 어른은 나하나뿐이지만 나는 삶의 가성비가 높아졌다.


아이들이 내 곁에 있다.

다가올 명절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

집안일을 내가 더 많이 한다고 분노할 일도 없다.


이런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연륜이 없어서,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서 혼란스러웠던 20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자존감을 파쇄기에 통째로 넣어 갈다시피 했던 그 20대의 결혼생활.


'잘못 들어선 길이다'

라고 느꼈을 때 과감히 유턴했던 30대.

그리고 먼 시간들을 돌아서 왔지만 용기 내어 다시 내 이정표를 더듬더듬 찾아갔던 30대의 하루하루들...



억울해하지 않으련다.

미워하지도 옛일들에 미련두지도 않으려 한다.


이미 지나간 것은 고정된 과거들이다.

지울 수도 덧칠을 할 수도 없다.


오로지 나의 의지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지금과 앞으로의 시간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로 나설 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서 일단 피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가시밭길을 들어설지, 진흙탕에 발을 담그게 될지 알 수도 없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



깊이 감사한다.


화려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일련의 과정들, 그 속에 녹아있는 아이들 나의 모습들.


식탁에서 웃으며 우리가 그때의 일들을 종알종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제 생각하니 하나였다.


어떤 시간들은 때론 묵묵히 견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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