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이 없다고 먹고 싶은 게 없었을까
이혼 후 이야기 #. 51
맞벌이를 하며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24살이었다.
남편이 잘 데려다줄 수 없을 만큼 엄마가 계신 고향은 멀었고 결혼해서도 자신의 엄마와 함께 사는 남편은, 임산부인 아내가 얼마나 엄마가 그리운지 당연히 모를 터였다.
엄마 집에 간다면 토요일에 간다 해도 최소 하룻밤은 자고 와야 하는데 일요일에 며느리가 교회를 빼먹는 걸 시어머니는 싫어했다.
아들은 말해도 안 들으니 더 자게 놔두라며 일요일 아침 교회 가는 날이면 며느리만 부지런히 깨우셨다.
임신 중에도 겨우 한 두 번 엄마를 보러 갔던 게 전부였다.
주중은 불러오는 배를 감싸 안고 바쁜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엔 어머니를 모시고 시누 집, 시아주버님 집 나들이(?)에 시간을 보내느라 태교라는 활동이 별다르게 없었다.
그걸 아는지 뱃속에 아이도 얌전했다.
딱히 입덧이라 할만한 증상은 없었다.
그냥 늘 먹던 음식을 먹었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고등어 구이가 먹고 싶었지만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제일 못 견뎌하는 것이 고등어 비린내였다.
가을쯤 접어들어 호떡이 먹고 싶었으나 때마침 호떡을 파는 놀이공원의 입장료가 호떡 값보다 몇십 배는 비싸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거절당한 이후 '임신 특수'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임신 중반 즈음 음식 솜씨가 좋았던 형님의 김치찌개가 갑자기 먹고 싶어 졌다.
임신 전에도 형님댁에 모여서 시가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면 막고기를 뭉텅뭉텅 썰어 넣고 묵은지로만 맛을 낸 형님의 김치찌개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형님은 무슨 음식이든 그렇게 뚝딱뚝딱 맛있게 내놓으셨다.
"여보, 형님이 만든 그 김치찌개가 생각 나."
항상 식구들과 모여 술 마실 궁리를 하던 남편은 내 한마디에 바로 형수에게 전화를 했다.
형수 집에 쳐들어가서 근처에 사는 누나들도 부르고 매형도 오면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임신한 아내의 건의(?)는 얼마나 구실이 좋은가.
술자리가 끝나고 자신을 대신해 운전할 줄 아는 아내가 한 시간이 넘는 야간 운전을 하는 것은 남편도 시어머니도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다짜고짜 김치찌개를 끓여놓으라는 남편의 전화를 받은 형수는 그날따라 뭔가 언짢은 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형제 많은 집 막내인 남편을 아들 키우듯 하셨던 형님은 평소에도 남편과 대화를 편하게 하시는 편이었다.
전화기로 흘러나오는 짜증과 고함은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 동서인 나를 충분히 주눅 들게 했다.
"안 먹고 싶어, 안 갈 거야. 나라도 짜증 나지... 아랫동서 입덧에 김치찌개 하라면 누가 좋아하겠어. 괜히 심기만 건드렸네."
서러움을 꿀꺽 삼키며 남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날 정확히 갔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큰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십수 년 전 일이라 그저 형님의 앙칼진 목소리와, 눈치 없이 바로 통화버튼을 누른 남편을 원망했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후 나는 '아주버님이 탐탁지 않아하는 여자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둘째까지 딸을 낳고 몸조리하는 도중에 가족모임을 했을 때 아주버님은 말했다.
"이제 더 안 낳는다고? 제수씨가 아들 못 낳으면 내가 어디 가서 아들 하나 만들어와야 될 판이여."
무언의 압박이 아닌 대놓고 압박이었다.
내 딸들이 어때서... 이쁜 딸들 낳아놨는데 아들이 왜 필요하지?
이혼한 후 어느 날 엄마에게 억울함을 가득 담아 이야기를 전했더니 엄마는 금방이라도 한대 칠 기세로 말했다.
"미친! 지랄하고 있네. 그 집구석 남자 새끼 하나도 옳은 놈 없구먼, 그 피에 똑같은 머스마새끼 낳아서 어느 여자를 또 뒈지게 고생시킬라고!"
엄마의 험한 말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눈물이 났다.
젖몸살에 젖이 불고 퉁퉁 부은 얼굴로 아기를 안고 아주버님 말을 듣고 있던 내게 남편조차 해주지 않았던 반응이었다.
시누들과 남편은 내가 일하러 나가는 것을 못마땅해했으나(밖으로 나도는 며느리 때문에 시어머니가 가사에 고생이라고 했다) 회사에 가면 나는 즐거웠다.
거기서는 내가 할 몫만 해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임부복을 입고 출근을 하자, 임신을 아신 사장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사모님께 하셨던 모양이었다.
사장님 댁은 회사와 담장 하나를 두고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웠다.
오전에 업무를 하는데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먹지 말고 사모님한테 가보라고 했다.
오전 업무를 조금 일찍 끝내고 사장님 댁 초인종을 눌렀다.
앞치마를 입은 채 내 손을 잡고 반기시던 사모님은 부엌으로 곧장 데리고 가셨다.
냄비에는 이미 떡만둣국이 끓고 있었다.
"친정이 멀다면서요? 여기서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가요. 에그.. 배가 불러오는데 회사에서 그 힘든 일을 하려니 얼마나 고생이 많아 그래...
저녁을 한 끼 먹이려고 하다가, 바깥양반 퇴근하고 들어오면 불편하잖아, 우리끼리 먹어요, 응?"
사모님은 나를 딸 보듯 측은하게 바라보셨다.
전골냄비만큼 큰 그릇에 떡만둣국을 한가득 떠오셨다.
"배불러도 많이 먹어요. 건강하게 출산하려면 잘 먹고 힘이 생겨야 돼."
사모님은 작은 그릇에 두어 국자 떠온 자신의 떡만둣국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하는 내내 나를 바라보셨다.
24살 임신한 새댁이었던 나는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식탁 유리 밑에 있는 나이테를 한줄한줄 세어보며 오물조물 떡국을 말없이 먹었다.
배가 너무 불러 다 먹기가 힘들었지만, 주방일 하시는 분을 두고도 사모님이 직접 끓여주신 그 정성이 너무 눈물 나서 어떻게든 다 먹으려고 노력을 했다.
아마 내가 임신 이후에 가장 과식을 했던 날이었을 것이다.
"혹시 뭐가 당기거나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면 꼭 말해줘요 알았지요? 내가 솜씨는 없어도 꼭 해줄게, 응?"
사모님은 현관에서 인사를 드리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님 댁, 그것도 사모님이라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엄마가 해주는 밥처럼 그날 점심은 참 포근하고 배가 불렀다.
괜히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한마디 내놓았다가 불에 덴 듯 움츠릴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다시 났다.
언젠가 사모님을 뵙는다면 그날 떡만둣국을 맛있게 얻어먹었던 새댁이 낳은 아기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그 기억을 오랫동안 포근하게 입고 있었노라고 두 손을 꼭 잡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따뜻하게 떡만둣국을 끓여 대접하고 싶다.
김장김치는 맨 밑에 있는 가장 크고 맛있는 포기로 숭숭 썰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