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에세이
어느 날 혼자 점심을 먹을 때 목사님의 새벽 설교를 들었다. 찬양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설교 말씀을 전해주었다.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백합화가 평화로운 곳, 요즘 소위 말하는 ‘꽃길’에 있지 않고 가시밭에 있다.
그 가시밭에 삭- 삭- 쓸리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을 가셨던 예수님.
그렇게 자신 안에 있던 향기를 세상에 흩뿌리셨다.
어느 곳에나 예수님이 함께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을 수 있도록.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가졌던 가장 좋은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다.
그것을 시작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주신다.
가장 존귀한 이가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 가서 많은 이들을 섬기셨다.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다.
*
생각한다.
나에게 아직은 작고 여린 재재를 키우는 일도 어쩌면 이렇게 ‘몸과 마음을 굽혀’ 귀한 존재를 섬기는 것이 아닌가. 나의 몸과 마음을 다해 재재에게 내가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능력과 사랑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단추를 끼워줄 때,
양말을 신겨줄 때,
신발 신는 것을 도와줄 때,
재재의 목소리를 조금 더 선명하게 들으려 재재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가 댈 때,
재재와 두 손뼉을 마주쳐 신나는 소리를 낼 때,
재재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길거리에서 재재에게 간식을 전해줄 때,
흘리는 음식을 닦아줄 때,
나는 몸을 굽혀 재재를 바라보고 만지고 말한다.
재재가 피로함에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낼 때,
건조한 무더위에 무조건 장화를 신고 가겠다고 고집할 때,
밥을 절대 먹지 않겠다고 할 때,
내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데도 자꾸만 안아달라고 할 때,
시무룩해 기어가듯 잘 안 들리는 목소리로만 말하고 입을 삐죽일 때,
놀다가 친구에게 장난감을 빼앗겨 서럽게 울 때,
놀다가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아가 ‘내 거야’라고 우길 때,
나는 마음을 굽혀 재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재재의 마음문에 노크하고 들어가 천천히 바라봐야 그제야 알 수 있는 재재의 속마음.
재재에게 엄마를 온전히 재재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재재가 괜찮아질 때까지,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재재의 공기를 나눈다.
작고 여리지만 하루 하루 놀랍게 건강하게 자라나는 소중한 인격체에게 몸을 굽혀 내가 줄 수 있는 손길과 사랑을 준다. 아무리 어려도 생생하게 느끼는 온갖 감정들이 온전히 ‘재재만의 것, 충분히 느껴도 괜찮은 것’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나와 남편은 자주 우리의 자존심과 권위를 내려놓고 마음을 굽혀 재재가 무대 위 주인공이 될 수 있게 재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한없이 흐르는 사랑을 눈으로 보여주고 싶을 때 나는 몸을 굽혀 재재를 안아준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슬픔을 재재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나는 마음을 굽혀 재재에게 안기기도 한다.
때로는 재재에게 몸과 마음을 굽혀 섬기지 못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힘겨루기,
이겨 먹기,
억압하기,
무시하기,
권위로 찍어 누르기,
무서운 표정으로 침묵하기,
미안하다, 고맙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단정하기……
재재가 아직 어려서, 힘이 어른만큼 세지 않아서, 생각을 입체적으로 하기에는 미숙해서 나도 모르게 함부로 말하고 바라볼 때도 있다. 실수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하루가 지나가기 전 반성과 다짐의 기회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다른 말 아닐까.
예수님이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에서 자신을 더 낮추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섬기셨다는 말...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자리’라고 해서 그곳에 있는 존재의 가치가 낮거나 천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상황이 어려운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격적으로 소중하게 볼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세상 어디에서나 마음을 열고 어떤 누구와도 값진 시간과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되면 어린 아이에게, 학생에게, 후배에게, 혹은 어떤 면에서든 나보다 ‘못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은 조금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이 소중하게 대우받고 있구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게 위안이 되는 자극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선함과 섬김으로 손길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다가가 의미 있고 소중한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하는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피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크고 작은 가시밭에도 향기로운 백합화가 흘러나갔으면 좋겠다.
*
어느 여유로운 점심에,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 재재, 나, 그리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몸과 마음을 굽혀 섬기는 일’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재재를 양육하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은 이렇게 영적이기까지 하다. 양육, 시작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