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에세이
재재가 서울에서 진료 받을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다. 광주에서 차로 약 3시간 반 거리. 재재가 중요한 진료를 받으러 간 것이기도 했지만, 겸사겸사 유학시절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던 친구를 오랜만에 보러 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당시 수도권의 코로나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어디에서도 안전하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 친구를 초대해 짧고 아쉬운, 그래도 반갑고 소중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가 물어본 질문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린다.
너는 재재가 커서 뭐가 됐으면 좋겠어?
그 자리에서는 그냥 말이 흘러나오는 대로 아주 짧게 대답했었다.
난 딱히 재재가 무엇이 꼭 됐으면 좋겠다, 하는 건 별로 없어. 자기가 원하는 걸 하면서 살면 좋겠어.
서울에서 돌아와 일상에 젖어 바쁘게 나의 일과 육아를 하다가, 문득문득 친구의 질문이 여전히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얼른 명확한 답변을 달라는 것처럼.
나는 재재가 무엇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재재가 커 나가면서 만들어나가겠지만, 나에게 이런 질문이 다시 던져졌을 때 부모로서 나는 어떻게 지혜로운 답변, 진실한 답변을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대답해보기 위해 이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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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날 친구에게 했던 대답과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 오히려 친구에게 했던 말이 내 답변의 첫머리문장이 될 수도 있겠다.
재재가 날로 자라는 동안, 재재의 이름처럼 자기 재능을 살려 윤택하게 살기를 바라는 나와 남편의 소망도 날로 자란다. 학령기가 지나면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며 평생 일하고 생산하고 돈을 벌고 살 것이다. 그런 재재의 일생이 부모가 원하는 진로나 직업을 추구하는 데 허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는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지’ 하며 자신의 목소리보다 엄마의 목소리를 더 신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는 내가 이런 일을 할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했었지’ 하며 가장 매력적이고 ‘재재스럽다’고 검증되지 않은 방향을 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모가 평생 이루지 못해 한이 맺혀 자식에게 은근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요구했던 직업을 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 기준에 휘둘려 자기 분수에 맞지 않거나 자기답지 않은 것을 손에 넣느라 전전긍긍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재재가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란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것을 몸소 실천해보기를 바란다. 젊은 날 충분히 실패하고 실수해보기를 바란다. 실패와 실수로부터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잘 알고 자신만의 성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다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다른 사람들과 협동, 기여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다 보면 지루해지고 무료해지는 게 직업일 수 있지만, “난 이걸 하길 참 잘 했다”고 여기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평생직장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평생직장보다 ‘평생직업’을 스스로 탐색하고 도전해보고 시험해보고 오래, 자기답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좋겠다.
‘무엇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재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 미덕, 성품, 인격, 재재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꾸준히 잘 가꾸어갔으면 좋겠다. 최종적인 목적이 어떤 사람, 무엇이 되냐 하는 명사형이 아니라, 언제나 재재가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떳떳하고 타인과 나누고 기여할 수 있게 ‘행동을 하는’ 동사형이면 좋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머무는 모든 곳을 사랑하고,
딱 그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본질이 들어간 삶을 살면 좋겠다.
그렇다면 재재가 어디에 취업해서 어떤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이야기할 필요도, 강조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서든 누구와든 무엇을 하든 재재 있는 그대로 반짝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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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 자신을 본다.
내 자녀에게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찾고 살길 바라는데, 나는 나 스스로 원하는 삶을 찾고 살고 있는 걸까? 자녀에게 바라는 걸 부모가 먼저 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힘없는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재재가 “우리 엄마는 자신이 하는 말대로 살고 있다”고 여겨주길 바란다면, 내가 선택하는 기준이 맹목적으로 부모의 기준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부모님이 나에게 원했던 삶의 모습과 양식은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나답게, 내 본성답게 잘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생각의 틈도 없이. ‘교수가 되는 것’이 오랫동안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 줄로 알았고, 그만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해 이유도 모른 채 끙끙대며 속이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이 상태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아마 친구가 그날 호텔에서 했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재재? 나는 재재가 아나운서가 됐으면 좋겠어. 왜? 그냥, 멋있잖아.
나는 재재가 검사가 됐으면 좋겠어. 왜? 그냥, 엘리트 출신에, 멋있잖아.
나는 재재가 교수가 됐으면 좋겠어. 왜? 명예의 최고봉, 멋있잖아.
나는 재재가 의사가 됐으면 좋겠어. 왜? 사람들이 알아주고, 돈 잘 벌고, 멋있잖아.
상상만 해도 참 찝찝하고 떳떳치 못하고 불쾌한 소름이 돋는 일이다.
저렇게 답하지 않았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했고 안도했다. 나는 내가 재재에게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지난히도, 성실히도 공부하고 깨닫고 나를 바라봤다. 지독히도 보고 싶지 않던 내 단점과 건강하지 않은 언어습관,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아주 단단한 부모와 사회의 메시지들. 모든 것이 내가 성장하는 데 도움 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주로 성공이나 부, 명예에 관한 메시지들은 거의 ‘나라는 사람’, ‘나는 어떤 사람’과는 관계없이 자리 잡은 메시지였다.
오래 걸렸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 삶을 살아야 하는지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답하며 힘껏 살아내기 시작하기까지. 그것을 위한 용기를 그러모으는 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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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재를 바라볼 때마다, 재재의 환한 미소에 나도 더 큰 미소로 화답할 때마다, 내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행복함과 동시에 약간 불안함을 느낀다.
이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나다운 목소리’를 따라가며 계획한 것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부모님이 나에게 원했던 삶을 선택하지 않은 나에게 실망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 자신과 내가 꾸려낸 새로운 가족을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을까.
재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재재 자신만의 삶을 아름답게 일구어갈 때 나는 자신 있게 재재의 온전한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라고 희미하게 대답하는 내 속마음에 귀 기울여본다.
그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오늘도, 지금도 나는 하루하루가 나다웠는지, 진실했는지, 떳떳하게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돌아본다.
알고 있다. 알면 변화해야지.
그래서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쓴다. 책을 읽고 감상평을 쓴다. 지혜롭고 넉넉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워크북을 만든다. 인터뷰를 하고 연구에 옮긴다. 조금 더 건강하게 변화하고 싶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워크숍을 열고 강연을 한다.
나의 인생을 나의 것답게, 재재의 인생을 재재의 것답게, 그렇게 가꾸어나갈 수 있으려면 늘 나부터 용기를 내어 도전해보는 거다. 내가, 남편이 지금은 재재가 보는 최고의 롤모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