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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넉넉 Jul 12. 2022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불다

화요일 에세이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오전부터 바삐 불리는 이름.

재재에게 나의 이름은 ‘엄마’이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 때문인지, 실제로 그런지, 어째 ‘엄마’라는 이름에는 휴무가 없는 듯하다. 걸핏하면 불리는 이름인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건(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휴무 없는 것 중에 가장 기껍고 반가운 것이 ‘내 이름 불리기’이다.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너를 알고 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이해한다, 너를 본다, 너를 관찰한다, 너에게 부탁한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너에게 간다, 너에게 물어본다,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싶다, 네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다,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사랑스럽다, 네가 예쁘다, 네가 멋있다, 네가 귀엽다, 네가 귀하다.     

이 많은 의미들을 한 범주에 모아 놓고 이 범주의 주제를 정하라고 하면 나는 “이름 부르기, 존재를 알아주는 것”이라고 정할 것이다.    


모든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짓고 부를 때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하고 의미 있는 뜻을 담는다. 존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기려는 것이 이름을 부르기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면 이왕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의 주인을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도록 표정과 말투와 목소리를 일치시키면 굳이 ‘넌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재재야, 여보야, 엄마, 아빠, 어머니, 아버지, 경진아, 유진아, 은아야, 민지야, 선미언니, 희원아, 주향아, 세라언니, 세라야, 슬기야, 석진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


우리는 망각의 존재, 인간이기에, 애초에 귀하고도 숭고한 마음으로 지어놓은 아이(그리고 주변의 많은 이들)의 이름을 매우 부정적인 순간에 함부로 부를 때가 있다. 화가 날 때, 짜증이 날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 무더울 때, 서러울 때, 억울할 때, 수치스러울 때, 죄스러울 때, 그리고 아이에게 혼을 내고자 할 때, 훈계하고자 할 때, 잔소리하려 할 때, 복종시키려할 때……     


재재얏!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지!
재재얏! 이렇게 하면 안 돼!
재재얏! 얼른 안 자?

    

내 안에서 일어난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임에도 재재에게 나도 모르게, 때로는 잘못 합리화하며(“재재가 잘못했으니까 혼이 나야지.”) 재재의 사랑스럽고 존귀한 이름을 헛되게 입에 올리게 될 때가 있다. 빠르게 반성하면 다행이고, 오래오래 재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내 손해다. 내 감정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재재의 예쁜 이름을 못나게 부르는 내 마음이 여전히 어지럽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의인화해 나 자신과 잘 이야기해 화해하지 못하고 재재의 이름에 탓을 돌리는 내 마음이 여전히 진정 어른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재는 결코 우리를 혼내려고, 우리의 잘못을 들추려고 ‘엄마’, ‘아빠’를 부르지 않는다. 언제나 나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와 남편에게 안기고 싶기 때문에, 나와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나와 남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른다.      


엄마 사앙해(사랑해).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 엄마 재재는 엄마가 좋아. 엄마 안아줘. 엄마 이거 해주세요. 엄마 동화책 읽어줘. 엄마 나 쉬하고 싶어. 엄마 나 졸려. 엄마 나 여기 아파 만져줘. 엄마 배 만질래. 엄마 우리 저기 같이 가자. 엄마 그거 해보까? 엄마 뭐했어? 엄마 오늘 재재가 뭐했냐면…

아빠 놀아줘. 아빠 비행기 태워줘요. 아빠 우리 물총놀이 하자. 아빠 오늘 우리 어디 가? 아빠 나 이거 사 주세요. 아빠 초록이한테 물 같이 주까? 아빠 뭐하고 있었어? 아빠 재재 배고파요. 아빠 이거 재재가 그린 거야. 아빠 이게 잘 안 돼요 도와주세요. 아빠 치즈 줘. 아빠 아빠도 먹을래?     


재재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그 다음 자신이 의도하는 말들에는 모두 ‘엄마와 아빠가 나라는 존재에게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가 엄마, 아빠에게 필요해’와 ‘너는 엄마, 아빠에게 지금 별로인 존재야’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이 이름을 부르곤 한다. 이렇게 보면 누가 더 진정한 선생님 같은가? 종종, 나는 재재에게 배우는 심정으로 재재가 우리를 부를 때 가만히, 자세히 재재의 표정을 본다.      


아, 그렇다고 재재가 늘 다정하게 나와 남편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재재도 마치 나와 남편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을 때 훈계조(?)로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가 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이렇게 돌리면 안 되잖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거잖아.
아빠, 써미니(family가 재재에게는 ‘써미니’로 들리나보다.)가 아니라 써! 미! 니! 라고 해야지.   


그러나 재재는 우리가 재재를 훈육하거나 가르치려 할 때보다 훨씬 장난기 어린 표정, 진지하게 ‘알려주고자’ 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눈에 힘을 주고 두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알려준다. 아주 적극적으로. 사실 이런 모습으로 엄마와 아빠를 부르면 얼마나 반갑고 귀여운지 모른다.     


다른 날에는 재재가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거나 피곤하거나 슬플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른다. 막 뭘 던지고 때리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엄마아아아아! 이거 싫어어어어~ 이잉이잉이잉~
아빠 이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 (우당탕탕)     


이런 식으로 나와 남편을 힘 빠지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든다. 아니, 사실 재재가 짜증내고 화내는 모습 뒤에 있는 마음이 어떤 건지, 어째서 저렇게 ‘마냥 아기처럼’ 구는 건지를 먼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와 남편을 힘 빠지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든다”고 재재를 탓할 수 있다. 인내심과 다정함을 잃지 않고 계속 이해하려고 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면,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괴로운 표현을 하게 하는지 아이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아이들에게는 늘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아이가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부를 때 아이의 합당한 이유를 들어보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엄마와 아빠가 선택해서 힘이 빠지거나 스스로를 불쾌하게 만든 것이다.     


이왕 좋은 의미로 내 아이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 이름답게 더 많이 불러주어야지. 재재가 자기 이름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매일 다정함과 사랑이 깃든 목소리로 불러주어야지. 때로 내가 너무 피로하거나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재재야!” 하고 엄한 목소리로 부를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재빨리 알아차려야지.     


아차차, 재재는 내 머릿속 마음속에 들어와 보지 못했으니 내가 이렇게 무섭게 부르는 것도 당연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 무서운 표정만 보겠구나. 재재의 마음을 공연히 어지럽게 하지 말자.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는 분명 큰 힘이 있다.

자주 자신의 이름이 다정하게 불린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 어색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존재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자주 자신의 이름이 분노와 울분과 함께 불린 경험만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이상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래도 항상 미워보이던 자기 이름을 조금이라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예상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자기 이름이 부드럽게 불릴 때 괜스레 기분 좋아지게 하는 힘이.

조금 울적했는데, 막 울적해지려고 했는데 자기 이름이 친근하게 불릴 때 묘한 위안을 느끼게 하는 힘이.     

학기 초에 각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하고 외워서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물론 개론과 같이 교양강의에 50명이 넘게 수강하는 경우에는 기억력의 한계로 그렇게까지는 못하지만). 재재에게 주변 사람들, 친한 사람들, 이웃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알려주고 재재 앞에서 그 사람을 다정하게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남편에게 다양한 이름(여보야, 남편, 오빠, 정복씨, 고박사, 마틴)으로 다정하게 다가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 돌을 향해 가는 재재는 이제 친구 이름 하나만 들어도 그 부모 이름까지 모두 말한다. 손가락을 하나, 둘 접어 세면서.     


엄마, 오늘 주한이앙(랑), 보미이모앙, 장혁삼촌이앙 같이 만나서 놀 거야?
아빠, 오늘 승미이모앙 만두형아앙 로희누나앙 같이 어디가?

희언이 이모! 세라이모! 수아이모! 주양이이모! 갱진이삼촌! 은아숨모!


친구 이름을 말하고 나면 그냥 친구 엄마, 친구 아빠 해도 될 것을 재재는 굳이, 정성껏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한 사람 이름만 말해도 다 같이 만난다는 의미로 알 수 있는 것을 재재는 힘주어 그 사람의 가족에 속한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른다. 재재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며 한 명, 한 명 말풍선처럼 떠올리는 표정을 할 때 나는 그저 놀랍다. 재재의 기억력과 다정함과 따스함과 사랑스러움에 완벽하게 행복해진다. 재재가 나와 남편이 서로의 이름을, 다른 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을 보고 관찰하고 신뢰하고 그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대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오늘도 재재에게, 남편에게,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나에게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야겠다. 당신과 나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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