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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넉넉 Jun 15. 2022

타당한 설명 = 부모의 창과 방패

화요일 에세이

코로나19 감염증 우려로 인해 교회에 대면출석을 안 하는 동안 재재는 어느 새 어린이 예배에 참석할 만큼 성장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재재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어린이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재재는 어린이 예배실에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으면서도 낯선 사람들, 처음 보는 또래 아이들과 부모들을 경계하는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손을 세게 붙잡고 내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섰다. 그런 재재의 경계심을 일순간 푸는 도구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의 놀이 동지, 장.난.감 !     


나는 좀 오바해서 재재를 재촉한다.

“재재야, 여기 레고 장난감 있다! 이쪽에는 미끄럼틀이랑 시소도 있네! 와, 재재야, 저기에는 주방놀이도 있다!”

재재가 예배실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더니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짓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이라 쑥스럽지만 반드시 여기 있는 장난감들을 다 가지고 놀아보겠다는 그런 재간둥이 미소.


어린이 예배 담당 교사들이 재재에게 다가와 친해지려는(?) 시도를 한다.

“재재야, 레고 가지고 놀아보려고? 뭐 만들 거야?”

“와, 재재가 비행기를 만들었어?”

“재재야! 이리 와서 친구들이랑 미끄럼틀 타 볼래?”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것이지만, 좀처럼 재재의 입과 마음을 열기에는 역부족이다.     


재재는 어른들이 돌고래 목소리 비슷한 톤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면 더 뒤로 주춤하는 아이다. 조용히 놀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저편에서 조용히 바라봐주는 어른에게 스스로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거는 아이다. 재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재재의 성향을 매일 '연구'하고 깨닫는 나로서는 선생님들에게 ‘재재 스타일’을 귀띔해주고 싶지만 기다린다. 재재가 여러 상황에서 재재답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    


재재는 이것저것 손으로 만지고 놀다가 마지막으로 주방놀이 도구 앞에 가 선다. 재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놀이 영역, 주방놀이. 후라이펜에 스테이크 모형을 올려놓고 치익- 소리를 내며 요리 흉내를 낸다. 레몬, 사과, 오이, 가지를 순서대로 도마에 올려놓고 칼로 툭- 툭- 썰어서 접시에 하나, 하나 담는다. 커피포트에 물 붓는 시늉을 하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으니 그곳에서 보글보글 끓는 음성효과가 난다. 재재는 한참 그 소리를 듣다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돌려 끄고 컵에 따르는 시늉을 한다. 컵을 조심스럽게 들고 나에게, 남편에게, 선생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드셔 보세요.” 한다. 접시에 담긴 음식들도 주변 어른들에게 쑥스럽럽지만 용기 내어 건넨다. 대접 받은 어른이 “냠냠 쩝쩝 아 맛있다, 재재야! 요리를 정말 잘 하는구나!” 하고 웃으며 칭찬하면 재재는 그제야 접시를 돌려받고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엄마, 나 이렇게 잘 놀고 있어. 봤지? 나 잘 하지?”

재재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재재의 눈만 봐도 이렇게 말하는 게 마음속에 들린다. 그럼 나는 재재의 눈을 단단하게 보고 활짝 웃는다. 고개를 크게 끄덕여보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답한다.

“내 새끼 잘 놀고 있어! 엄마가 여기서 다 보고 있어. 아이쿠 기특해라. 맘껏 놀아, 재재야.”


아이들은 자기 모양대로 놀고,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봤다가 예배실 구석에 있는 TV 모니터를 봤다가 한다. TV 모니터에서는 본예배가 진행되는 현장이 송출되고 있는데 사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내 거, 네 거” 하는 소리,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말 거는 소리가 한데 섞여 무지개 같이 반갑고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

 

예배가 중간 이상 진행됐다고 느끼는 사이, 갑자기 어린이 예배실 문이 활짝 열어 젖혀지고 키 작은 한 남자 어르신이 힘차게 들어온다.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그쪽에 꽂힌다. 머리는 희끗하고 작은 눈, 코, 입이 얼굴 한가운데 몰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외모. 교사들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 아빠들은 어리둥절하게 보면서도 교회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리에서 어설프게 일어나 목례를 한다.      


이어 그분이 말하는 것에서 어린이 예배 공간을 직접 디자인했거나, 건축에 공을 들였거나 할 법한, 이 공간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애들, 잘 놀아요? 공간은 협소하지 않죠? 편안해요? (이쪽저쪽 아이들을 한 명씩 바라보며) 응, 잘 놀고 있네. 얘들아, 재미있게 놀아라!”     


그러더니 그분의 레이더망에 우리 재재가 쏙 들어온 모양이다. 목소리와 말 내용을 들어 보아하니 재재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분에게 꽂힌 건 아닌 모양이다. 그분은 주방놀이에 몰두한 재재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큰 소리로 말한다.

“이런, 남자 새끼가 부엌놀이를 하네?”

재재가 흠칫 놀라며 손에 갖고 있던 조리 도구들을 다 떨어뜨리고 서둘러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나에게 안겨 그분을 올려다본다. 내 어깨춤에 손을 올리고 힘을 줘 내 옷을 붙잡는다.

그분이 하하하 시끄럽게 웃으며 다시 재재를 보고 말한다.

“남자가 요리 놀이를 하면 어떡하나. 느(네) 아빠가 집에서 요리하디? 부엌에 있디?”     


순간, 내 마음속 못생긴 괴물이 얼굴과 소리를 비집고 그분을 공격할 뻔했다.

“다 큰 어른이 말도 잘 못하는 어린 아이 앞에서 노는 걸 가지고 그렇게 심각한 내용으로 말하실 일입니까.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남자애가 요리를 하는 것, 여자애가 트럭을 가지고 노는 것을 가지고 비웃으십니까. 집에서 부모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걸 유아에게 큰 소리로 물어보시다뇨. 그렇게나 생각이 짧으십니까.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하십쇼.”     


여기는 교회이자 작은 사회이고, 주변 사람들이 긴장해 경직되어 있고, 무엇보다 재재와 아이들은 응당 어른들에게서 건강한 것을 배워야 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 생각으로 애써 내 안의 괴물을 타일렀다.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요즘에 남자아이, 여자아이들은 모든 종류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더 건강하게 정체성을 찾는대요. 그리고 요즘에는 남자들도 요리 잘 해야 인기가 많아요.”

그리고 재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재재가 재미있게 요리하고 있는 걸 보고 할아버지가 귀여워서 잘 논다고 하시는 말씀이야. 무서워하지 말고 가서 더 놀아도 괜찮아. 엄마가 보고 있어. 괜찮아.”


사실 내가 그분과 재재에게 한 말은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자녀가 어떤 사람으로 인해, 어떤 상황으로 인해 막연히 두려워한다면, 그래서 하던 일에 다시 집중하지 못한다면, 부모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녀에게 ‘타당한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권위자이고,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부모라면 자녀가 순수하게 하는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으니 계속 집중해서 해도 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  

성정체성은 남자아이라고 ‘남자의 것’만 가지고 놀고 여자아이라고 ‘여자의 것’만 가지고 놀아야 하는 게 아니라, 성역할을 넘어서는 다양한 놀이를 한 후에 성의 다양성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건강하게 습득할 수 있다는 것.


그분은 나의 말을 듣고 웃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어허- 큰일이네, 큰일이야.”

무엇이 큰일이라는 걸까. 그분이 살아온 시대적인 배경, 그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에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님을 고려하면 그 ‘큰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비롯해 그곳에 있던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재재에게 믿음직한 엄마가 되련다.


그분이 자신이 보였던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큰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으나, 마지막 그분의 한 마디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마음 편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분은 신발장 근처에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재재 아빠, 내 남편인지 모르고.

“아빠가 어린이 예배실에 있어요? 본 예배당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여자들은 아이를 보느라 어린이 예배실에 있는데, 그 가운데서 남자어른이 할 게 무어냐는 그런 뉘앙스.

모든 것을 지켜본 남편이 덤덤히 말했다.

“예, 여기에 아들이 있어서요.”     


그분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남편의 말을 듣고 픽- 웃더니 바로 문을 향해 간다. 올 때는 힘찬 걸음으로 문을 크게 열고 들어오더니 나갈 때는 별 말 않고 나간다. 이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어쩐지 그분이 재재보다 작아보였다. 아이들은 그분의 말에 두려움으로 침묵했지만, 그분은 자기가 하는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는 채 떠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보다 어른이 작아보이는 이유이다.


연배가 높은 어르신들이 하는 말에는 시대적인 배경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은 없다. 그렇기에 만일 그 상황에서 내 속의 못생긴 괴물의 표정과 목소리로 응답했다면 그야말로 ‘세대 간 싸움’ 혹은 ‘목소리 큰 미성숙한 인간들의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 우리라면 재재와 그분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재재에게 신뢰할 수 있는 ‘어른’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분이 예배실 밖으로 나가고 난 이후에도 재재는 나에게 꼭 붙어 문 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재재가 정말로 괜찮아져 다시 주방놀이를 시작할 때까지 “괜찮아”를 계속 반복했다. 옆에 있던 교사가 재재 옆으로 왔다.

“재재야, 주방놀이 잘 하고 있어. 재재가 요리해주니까 너무 맛있어! 계속 놀아도 돼!”     

그렇게, 나의 타당한 설명에 힘을 실어주는 교사에게 고마웠다. 재재와 아이들이 안심하고 놀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참으로 고맙다.     


재재가 어떤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어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상황의 본질을 잘 몰라 재재를 의도치 않게 위협할 때, 그 자리에 내가, 남편이 부모로서 아이와 함께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때마다 타당한 설명을 해줄 것이다. 반복적으로 타당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재재를 지키고 살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나쁘게 일컫고 비하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재재에게 늘 위협적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그리 문제를 크게 만들 필요도 없다. 다만 재재가 순순하게 하는 말과 행동이 엄마[아빠]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저 사람만의 선한 의도가 있을 뿐이고, 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이만저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재가 덜 불안하게, 덜 두렵게, 더 집중하게, 더 재미있게 순간에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면 되는 것이다.     


조용히, 다짐한다.

재재가 재재답게 자유롭게 놀고 크는 걸 격려하고, 때로 설명이 필요할 땐 구구절절하더라도 이런 저런 상황을 설명해주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

그렇게, 재재가 커 나가면서 진실로 마음으로도 ‘큰 사람’이 되게 도와주어야지.

그러려면 내가 재재에게 먼저 ‘큰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매일 공부하고 깨달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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