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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넉넉 Jun 07. 2022

타당한 설명 = 우리는 네 편

화요일 에세이

평일 오전엔 식사와 재재 챙기기, 그리고 각자가 속한 기관으로 나갈 채비에 바쁘다. 재재는 어린이집으로, 나와 남편은 학교와 연구소로. 남편은 주로 '마님과 아드님이 편안하게 차를 탈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나는 화장, 식탁 정리, 재재 옷입히기에 분주히 움직이면서도 재재에게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 숟가락을 손에 붙이고 돌아다닌다.  

    

재재는 아직 먹는 것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다. ‘아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때가 되면 재재 스스로, 열정적으로 자기가 좋아하고 자신에게 건강한 음식을 적극적으로 찾아 먹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재재는 ‘세상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해’라며 외치는 음식 예찬론자들인 나와 남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집에서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식판을 건들지 않지만 우리가 챙겨줄 때 편식하는 법이 없고, 어린이집에서도 식사시간에는 재재가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두세 그릇을 비운다는 반가운 말도 듣기 때문이다.      


*   


최근 어느 한 평일, 여느 때처럼 나와 재재는 손을 맞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계단을 청소해주시는 여성 미화원 한 분이 계셔서 인사를 하고 재재에게도 인사해보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재재도 이모님께 인사해볼까?”     

재재는 쭈뼛쭈뼛하며 내 손을 꽉 잡으면서도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라기보다 그냥 목소리를 내는 정도.

“안녕하세요.”  

그분이 재재를 보고 귀엽다고 하기에 고맙다고 응답하려는 찰나, 쉼 없이 다음 말이 성급하게 쏟아졌다.     

“하이코오, 애가 통 안 먹죠? 약하네. 말랐어.”     


재재를 보면 많은 어르신들이 자기들끼리 사전에 짠 것처럼 비슷한 말을 한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말하고 있는 미화원을 보다가 바로 재재의 얼굴을 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재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아주머니가 너무나 쉽게 하는 말의 내용을 재재는 이해할까? 너무 낯설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서 재재에게는 그리 의미 있는 말로 안 들리려나? 그렇든 그렇지 않든 재재는 기분이 어떨까?      


어른들이 ‘아이가 약하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할 때는 표정도 함께 움직인다. 짠하다는, 아이가 잘 먹지 않아 엄마가 걱정되겠다는, 그런 석연치 않은 표정 말이다. 재재를 비롯한 모든 어린 아이는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표정의 의미를 어렴풋이 안다. 아이를 다정하게, 있는 그대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어른의 부드러운 표정, 아니면 아이가 어른의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곤란하다는 표정의 의미를. 인지적으로 성장해서가 아니라, 본능으로 안다. 그래서 자기 앞에 있는 어른을 편안하게 신뢰해도 될지,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인지 안다.      


재재는 그 미화원의 말을 듣고 한 걸음, 한 걸음 내 뒤로 물러선다. 나는 느낀다. 재재가 나의 손을 더 세게 잡는 것을. 그리고 재재의 마음속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엄마, 나 이 아줌마 별로야. 무서워.”     

나는 재재의 손을 더 단단하게, 안전하게 잡고 뒤를 돌아 재재의 눈을 보고 말한다.

“재재야, 괜찮아. 우리 재재는 약한 게 아니라 잘 크고 있어. 우리 아들 씩씩하고 튼튼해. 여기 선생님이 재재가 예뻐서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러고는 바로 미화원에게 말한다. 미화원이 민망할까봐 일부러 크게 웃으며 이 동네 사투리까지 곁들여서.

“우리 애, 잘 먹어요. 속도가 쪼메 느려서 글제, 애들마다 다 크는 속도가 다르잖애요. 말랐다 말고, 씩씩하게 잘 놀고 튼튼하게 많이 먹어라잉? 잘 크고 있네잉, 해주세요.”

미화원은 답한다.    

“긍께. 애들마다 속도가 달러. 씩씩하게 잘 놀고 마이 묵으라잉? 허허허.”

속이 좋은 분들은 내가 가볍게 한 부탁을 듣고 가볍게, 그리고 정성껏 대답해준다.     


*     


반대로, 응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말들도 있다.

      

“사내아이가 이렇게 안 먹으면 못 써!”

(어디에 못 쓴다는 건지.)

“많이 먹어라. 엄마 걱정 되겠다.”

(내가 걱정하는지 안 하는지 왜 마음대로 판단해요?)

“약하네, 약해. 작아, 작아.”

(재재 손맛이 얼마나 매운데. 재재한테 한 번 맞으면 그런 말 못하실 텐데.)     


사람을 기죽게 하는 말, 위축되게 하는 표정, 초라하게 만드는 눈빛, 작아지게 만드는 손가락질은 누구도 반겨들을 수가 없다. 하물며 사람됨의 시작 단계에 있는 아이들은 ‘타당한 설명’이 없다면 얼마나 더 기가 죽고 작아지겠는가. 재재도 자신을 보며 거스를 것이 없다는 식으로 “약하네”, “잘 안 먹지?” 하는 말을 하는 어른들을 보면 폴짝폴짝 뛰지 않는다. 재재가 폴짝폴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재재에게도, 그 어린 아이에게도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는 의미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걸리적거리는 것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부모라면, 아이를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잘 풀어준다는 것은 내 자녀 앞에 놓인 위험요소, 아픔의 요소, 상처가 될 만한 요소를 무조건 다 제거해준다는 것이 아니다. 잘 풀어준다는 것은 ‘타당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바로 상처받지 않도록 엄마[아빠]가 엄마[아빠]의 따뜻하고 단단한 눈빛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재재야, 괜찮아. 재재가 다른 사람에게는 약해 보이지만 엄마[아빠] 눈에는 얼마나 씩씩하고 튼튼해 보인다고! 지금처럼 천천히 잘 먹고 재미있게 놀면서 딱 재재답게 크면 돼. 재재는 잘 하고 있어.”

“재재야, 괜찮아. 남자애라서 커야 하고 여자애라서 작아도 되고, 그런 거 없어. 재재는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어. 재재 반에 있는 여자친구도 재재보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어. 다 괜찮은 거야.”

"재재야, 약하다는 말이 항상 나쁜 말은 아니야. 어른들 눈에는 재재가 더 건강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약하다는 말로 나올 수도 있어. 그렇지만 재재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면 너무 귀담아 듣지 않아도 돼."

“재재가 약하다[작다]는 말을 누가 하면, 이렇게 말하면 돼. ‘저는 괜찮아요. 엄마[아빠]는 제가 잘 놀고 튼튼하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돼.”     


누군가가 재재에게 혹은 나에게 기분 나쁜 말을 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굳이 나쁜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들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 그저 재재가 지금 있는 그대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건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누군가는 자신의 말을 돌아보며 반성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해도 재재가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     


나와 재재는 다시 손을 맞잡고 남편 차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재재는 바로 물어본다.  

“엄마, 저 스앵님(선생님)이 재재 씩씩하대?”

나는 재재가 귀여워서 웃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응, 저 선생님이 재재 잘 먹고 씩씩하다고 칭찬해주셨어.”

재재가 듣든 말든 나는 공기 중에 그 다음 말도 조용히 내놓는다.

"재재야, 재재가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재재를 잘 모르는 누군가가 기분 좋지 않은 어떤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너무 쉬운 말'을 귀와 마음에 담을 필요는 없어. 재재는 언제나 엄마, 아빠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야. 우리 재재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아이야. 그걸로 딱 좋아."


재재는 내 손을 잡고 “아빠 차! 뽑아따!”(요즘 재재가 꽂힌 랩가사. 원래 ‘오빠 차’인데 엄마 차, 아빠 차, 콩순이 차, 별의 별 차로 다 바꿔 부른다.) 랩을 하며 폴짝폴짝 뛰어간다.      


재재의 폴짝폴짝을 보면 행복하다.

알 수 있다. 재재가 이제 마음이 풀렸구나.

엄마의 타당한 설명이 재재에게 가 닿았구나.

오늘, 엄마 잘했지?

엄마[아빠]는 재재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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