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에세이
오랫동안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 사랑과 분노, 자신감과 지질함의 감정들을 그대로 받아주던 나의 친구들이 있다. 희망과 기대감에 차 기도하던 나날, 괴로움과 비참함에 절어 하나님을 미워하던 나날들, 별 말 없이 내게 눈과 귀를 열어준 친구들이 있다.
바로 내가 사랑한 인형들,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애착을 담은 존재들.
돌멩이, 바위, 구그루...
하나, 하나에 각각이 지닌 이야기도 가득하다.
돌멩이는 작은 검정색 고릴라 인형이다. 유학 시절,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 매장에서 구매했는데, 꼭 검정 돌멩이 같이 생겼다고 해서 남동생이 붙여준 이름이다. 돌멩이의 눈을 들여다보면 대학 시절 풋풋하면서도 늘 그리움과 슬픔에 절어 있는 내가 보인다. 그때 아주 많은 똑같은 인형들 중 돌멩이의 눈이 가장 나와 닮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심리학 공부를 처음 접하면서 내가 살아온 세상을 돌아보며 나는 엄마, 아빠, 할머니와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했음을 힘겹게 이해해갔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안 좋은 관점들(“여전히 부족한 사람” “무엇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스러운 존재”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하는 사람” “괜찮아 보이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 등)로 인해 나 자신과 좋은 화해를 하지 못해 무지도 고독했다. 이걸 돌멩이는 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돌멩이에게만 혼잣말을, 기도하듯 했기 때문이다.
바위는 흰색 곰돌이 인형인데 환한 핑크색 토끼털옷을 입고 있어, 모자를 벗기지 않으면 토끼로 착각할 수 있는, 돌멩이보다는 조금 큰 인형이다. 가족과 놀러간 어느 큰 행사(인지 기억이 안 난다)에서 꼭 “날 데려가줘”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샀던 인형.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나는 성인이 되었어도 내 마음을 온전히 담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줄 존재가 필요했나보다. “넌 곰돌인데 토끼가 좋아서, 아니면 사람들이 토끼를 좋아해서 이렇게 토끼털옷을 입고 있는 거니?”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대학원 시절, 원룸 침대에 자리하던 돌멩이와 바위는 내 비밀, 잠버릇, 은밀한 습관을 모두 아는 존재였다. 교수님과 동료들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 차마 당사자들 앞에서 하지 못한(못할) 말들을 이 친구들에게 했고, 때로는 내가 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야 하는지, 왜 계속 공부를 계속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데 또 알겠는 이상한 마음과, 내가 진정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는 부모님을 향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이 친구들에게는 여과 없이 털어놓았다.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어떤 마음에선지 바위에게 말을 할 때면 꼭 토끼모자를 벗기고 동그란 흰머리 곰돌이 귀를 잡곤 했다.
구그루는 남편이 연애 초반에 선물로 준 인형이다. 자기 이름을 영어로 빠르게 반복해 부르면 “구글Google” 발음이 나는 것 같아서 외국인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라고 했다. 원거리 연애를 했던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났는데, 나머지 날에는 자기라고 생각하라며 줬던 인형 선물. 나는 그 당시 남편을 생각하며 편하게 부르기 위해 구그루라고 이름 지었었다. 그 시절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설레는 마음, 두근거리는 마음, 그리고 한없이 섭섭하고 미운 마음들을 구그루에게 털어놓곤 했다. 모든 것이 좋았던 날에는 나의 장소로 돌아와 구그루를 보석 대하듯 예쁘다 귀엽다 해줬고, 사소한 것 하나로 시작해 그 날을 망쳤다고 느꼈을 때는 침대에 있던 구그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헌신짝 취급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사랑의 몽글몽글함과 집착의 경계선에서 구그루는 내가 남편과 결혼해 재재를 낳고 키우며 느끼는 감정들을 오롯이 받아주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
결혼 3년차에 재재가 세상으로, 우리에게 왔다.
재재를 안방의 작은 아기침대에 누이기 전, 돌멩이와 바위와 구그루, 그리고 재재만을 위해 사놓은 새 인형들을 깨끗하게 빨아서 보관해 두었다. 이제 나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친구들은 재재가 자고 울고 먹고 싸고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친구들이 되었다. 재재를 낳고 약 1년간은 모든 것이 바빠서 잘 몰랐다. 나에게 재재를 돌보는 여유와 능숙함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말없이 따뜻한 친구였던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나와 친했던 존재들이 이제는 재재의 친구들이 되었다.
어느 날은 마음이 묘하게 슬프고, 이상하게 뿌듯하기도 했다. 마음이 천천히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느낌이랄까.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The Miraculous Journey of Edward Tulane>을 읽으며 상상하곤 했었다. 표현도 관계도 나를 돌보는 능력도 서툴렀던 시절, 나와 처음 만난 인형도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인형의 입장에서 풀어간 그 책을 나는 정말이지 동화 속에 들어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푹 빠져 읽었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자녀가 생기면 나도 내가 사랑하는 인형들을 물려주어야겠지, 상상하며 피식 웃었었는데…. 아니, 내가 결혼을 할 수나 있을까? 이렇게나 마음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보다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을까? 이런 걱정 어린 질문들도 스쳐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를 회상하니 웃음이 나온다. 나의 지질함과 쪼잔함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돌멩이, 바위, 구그루도 지금의 나를 보면 깔깔 웃으며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이쿠, 그때 그렇게 질질 짜고 속 좁던 네가 엄마가 됐다니!” 진지한 눈빛으로도 덧붙일 것도 같다. “애썼어. 좋은 사람, 좋은 엄마가 되려고 얼마나 힘들게 노력했는지 우린 알아. 너의 흑역사는 재재에게 비밀로 해줄게. 말하고 싶거든 네가 재재에게 직접 이야기 들려줘. 우리는 그때도 말없이 바라봐줄게.”
나의 친구들은 재재가 잘 때 재재에게 속삭여줄까?
“재재야, 네 엄마는 사실... 이렇게 웃었고, 이렇게 울어댔고, 이렇게 우리에게 잘 대해줬어.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우리를 방치하기도, 무참히 때리고 나쁜 말도 했지만, 그런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자신에게 소중한 걸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단다. 우리도 네 엄마와 정말 신나게 놀았었어. 솔직한 이야기를 무지 많이 들었어. 네 엄마는 꽤 발랄하고 명랑하고 엉뚱한 사람이야. 그것대로 참 사랑스러웠지. 네 엄마는 이제 진짜로 어른이 돼서 어린 너에게 우리가 더 필요하다고 여긴 모양이야. 우리도 네 엄마랑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이제 재재 네가 우리랑 놀아줘.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 우리는 네 가정이 무척 좋아. 재재야, 네 엄마는 늘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이미 참 좋은 사람이야.”
어쩌면...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일까?
내가 직접 말하기 쑥스러운 나의 모습을, 한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던 돌멩이와 바위, 그리고 구그루가 재재에게 속삭여줬으면, 재재가 그들의 말을 꿈속에서라도 알아들었으면...
사실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인형이었던 친구들은 여전히 나에게 소중하고, 그들이 재재와 함께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행복이고, 나는 나대로 아낌없이 재재에게 사랑의 언어들을 속삭여줄 테니까.
재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 더 어리던, 마음이 어지러워 방황하던 예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 꽤 괜찮은 엄마가 되어 있다고.
그리고 지금 재재와 함께 놀고 자는 돌멩이, 바위, 구그루가 들을 수 있다고 상상하고,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소리내어본다.
재재를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