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에세이
코로나19 감염증은 나와 남편을 비켜갔다. 그러니까 재재만 확진되었다는 뜻이다. 재재는 코로나19 감염증(정확히 말하면 오미크론)으로 인해 5일간의 자가 격리 이후에도 일주일 가량을 더 가정에서 생활했다. 만에 하나 어린이집의 다른 아이들이 감염될 우려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약 2주간 엄마, 아빠 품에서 지내다가 드디어 어린이집에 등원한 날! ‘드디어’와 느낌표(!)를 쓴 것은 재재가 어린이집에 감으로써 나와 남편에게 진정한 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재재가 이 글을 본다면 그때는 엄마, 아빠에게 ‘진정한 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리라 믿으면서 쓴다. 호호.
하루의 약 3분의 1 가량의 시간을 어린이집에서 보내다가 2주간 무한대로 엄마와 아빠의 보살핌, 보듬음, 보필을 받으며 지냈던 것이 어린 재재에게는 약간의 후유증을 남긴 듯했다. 그 후유증이라 함은 ‘엄마, 아빠 껌딱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엄마! 하고 부르면 “오냐 우리 새끼.” 하고 반응하는 엄마. 아빠! 하고 부르면 “오야 우리 아들.” 하고 다가가는 아빠. 삼시 세끼 밥도 엄마, 아빠와 눈을 마주하고 먹을 수 있고, 엄마와 소꿉놀이, 아빠와 몸놀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던 그 시기에 재재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지 아니했겠는가. 종일 마스크를 벗고 집에서 엄마, 아빠와 자유롭게 호흡하며 생활하니 이것이 웬 ‘내 세상’인가 할 것이었겠는가. 엄마, 아빠와 묶여있는 즐거운 구속.
격리가 끝난 후 등원하던 날 아침, 재재는 집에서부터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말했다. 신발장에서, 남편 차에서, 차에서 내려 어린이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어린이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계속 말했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엄마, 아빠, 보고 싶을 것 같아.”라거나, 하원할 때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직 과거와 미래 시점을 표현하는 언어력이 미숙한 탓일까. 그것이 타당한 인지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나는 재재가 지금 당장, 엄마와 아빠를 무지막지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인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땅의 모래알만큼, 하늘의 별만큼, 우주의 수많은 행성만큼, 그리고 이 모든 광활한 것들의 크기를 능가하는 재재의 작은 마음속 무한한 가능성만큼 엄마,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재재는 자신이 어린이집에 결국 가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차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 몇 블록을 지나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블록을 돌 때 나오는 호수의 분수를 보면 재재는 바로 나에게 안긴다. 차 안에서 아무리 엄마, 아빠와 신나게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있었더라도. 아무리 재미난 콘텐츠를 보고 있었더라도. 아무리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자기가 멋지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더라도. 그 호수를 볼 때면 무조건 나에게 두 팔을 벌려 다가온다. 어린이집에 다 왔다는 것, 그것은 엄마와 아빠에게 “안녕, 이따 봐.”를 말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린 재재는 아는 것이다. 재재의 얼굴빛이 어두워지면서 고개는 아래로 향하고 입술은 삐죽 앞으로 나온다. 그 모습에 나도, 남편도 재재가 사무치게 사랑스럽다. 우리에게 벌써 재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인다.
우리는 안다. 약 6~7시간이 지나면 동일한 장소에서 두 팔 벌려 반가운 소리를 공기에 퍼뜨리며 함께 껴안을 것임을. 그렇지만 어린 재재가 그 사실을 알 길은 없다. 엄마, 아빠라는 따스하고 시원한 움막에서 지내다 어린이집이라는 사회에서 ‘씩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하는 숙제는 재재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성장과정인 동시에 상실감과 버거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 마음을 부모(어른)는 알아야 한다.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반드시 돌아와 그 순간에 충실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말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재재가 쉽게 나에게서 떨어질 리가 없다. 남편이 함께 가는 날은 재재가 나에게 안겨 있는 동안 남편이 실내화를 신겨 주고, 남편이 함께 못 가는 날은 선생님이 그 일을 해준다. 한 번은, 선생님들이 우리 재재를 보고 “너무 어리다” 하거나 나를 보고 “너무 오냐오냐 받아준다” 하지는 않을까 염려한 적이 있다. 남편과 이 고민에 대해 이야기한 후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사랑하는 부모와 잠시라도 떨어져야 하는 아이의 상실감과 버거움 과정을 이해 못 하는 선생님이라면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재재는 자기 신발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겨지는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나에게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면 내가 재재의 귓가에 잔잔히 말한다.
재재야, 재재가 씩씩하게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노는 동안 시간이 동그랗게 째깍째깍 갈 거야. 시계가 반절 딱 차면 엄마랑 아빠가 와서 우리 재재 꼭 껴안아주고 뛰어놀고 집에서 재재가 하고 싶은 놀이 다 같이 할 거야. 모두 다. 약속할게. 엄마가 하나, 둘, 셋, 하면 재재 선생님에게 가는 거야. (그 사이, 기특하게도 재재는 내 말을 듣고 있다.) 알겠지?
“알겠지?”라고 하면 재재는 느리게라도 힘없이 “응” 하고 나에게 속삭인다. 나는 재재의 엉덩이에 힘을 주어 흔들면서 “하나, 둘, 셋!” 외친다. 바로 선생님에게 재재를 넘겨 보내준다. 격리 직후 약 2-3주간은 나의 하나-둘-셋 목소리 이후 재재의 오열이 바로 따라왔다. 3주 정도가 지난 후에도 재재의 현재 진행형 ‘엄마-아빠-보고 싶어’ 그리움 표현은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3~6월) 정도는 심하게 우는 날과 조금 우는 날과 나름대로 씩씩하게 가는 날의 협주가 이루어진 것 같다. 그래도 재재는 나의 하나-둘-셋 목소리를 들으면 나의 목덜미에서 손의 힘을 뺀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해본다. 결국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엄마의 하나-둘-셋이 마치 재재의 손에서 힘을 푸는 주문의 효과가 있다는 것. 하나-둘-셋 전에 내가 하는 약속을 재재가 신뢰한다는 것. 엄마, 아빠와 떨어지는 것이 가슴 아프고, 씩씩한 어린이가 되는 것이 아직 버겁지만 그래도 엄마와 아빠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재재가 나의 “알겠지?”에 조용히 “응”이라 속삭이는 것이리라, 그렇게 재재의 마음의 용기와 힘을 믿는다.
그리움의 눈물과 새끼손가락 맞잡은 단단한 약속이 반복되던 어느 날, 재재가 거실에서 아기 인형을 들고 역할놀이를 하는 걸 보고 울컥한 적이 있다. 내가 어린이집 현관문까지 가면서 재재에게 꼭 돌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약속, 그리고 하나-둘-셋 목소리를 재재가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구슬같이 굴러가는 아이 목소리, 재재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아기 인형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콩콩아, 시간이 이이이렇게 돌아가면 돌아올게. 그럼 같이 놀자. 하나, 둘, 셋, 하면 스앵님(선생님)한테 가는 거야아아아? 알겠지? 하나! 둘! 셋!
이렇게 여러 번 말하는 재재를 부엌에서 바라봤다. 마음속에서 눈물 파도가 일렁였다. 입술을 꼭 다물고 턱의 떨림을 느꼈다. 아련하게 마음이 아파오면서도 자랑스러움과 사랑스러움에 몸 전체가 따스한 숄에 휩싸이는 듯했다. 우리 재재가 엄마의 목소리를, 약속을 기억하고 있구나. 엄마, 아빠와 떨어지는 상실감과 씩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하는 버거움을 이겨내고 재재는 커나가고 있구나. 장하다 우리 아들. 사랑해, 사랑해.
먼발치에서 그렇게 눈물 파도를 잠잠하게 다스리고, 재재에게 다가가 말했다.
재재야, 콩콩이한테 하나, 둘, 셋, 했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어?
응.
그럼 콩콩이는 기다릴 수 있을까?
응.
재재가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니까?
응! 내가 약속했떠.
재재야, 엄마가 재재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 어때?
응?
슬퍼? 엄마랑 어린이집에서 ‘안녕-’ 할 때?
응.
그래도 항상 시간이 이렇게(손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흐르면 엄마랑 아빠가 꼭 데리러 가지이? 그럼 우리 재재 괜찮아?
응. 괜찮아.
재재야, 엄마, 아빠 좋아?
응 좋아.
재재는 다시 분명히 말한다.
엄마, 아빠 좋아.
고맙다며, 사랑한다며, 재재의 볼에 입 맞추고 꼬옥 껴안는다. 자기 놀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도 엄마를 안아주며 살짝 미소 짓는 재재가 다시 한번, 나보다 더 큰 존재인 것 같다. 이 아이는 엄마 마음을 읽는 마법을 가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아이는 마법사가 아닐까, 하고 잠깐 뚱딴지같은 생각을 해본다.
다시 아기 인형과 역할놀이를 하는 재재를 바라본다.
엄마를 너무너무 좋아해 줘서, 무지막지하게 사랑해줘서 고마워, 재재야. 이 세상에 엄마를 재재만큼 사랑해주는 존재는 없을 거야.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엄마를 사랑해주는 존재는 재재밖에 없을 거야. 고마워. 엄마, 아빠에게 지금 당장, 여기서, 함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어서.
지금이 엄마, 아빠에게는 재재에게 묶여있는 즐거운 구속의 시간인 것 같아. 언젠가는 재재가 장성해 이 구속의 시간이 끝나겠지. 그때가 되면 많이 허전하고 이유 있는 슬픔이 차오르겠지. 그래도 괜찮아. 엄마, 아빠, 재재가 서로에게 행복하고 기쁘게 구속되어있어 평생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얻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때까지 우리 매일의 지금을 누리자. 재재의 사랑이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엄마와 아빠도 서로에게, 그리고 재재에게 현재 진행형인 사랑을 마음껏 보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