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Oct 27. 2024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쳐맞기 전까진 PART1

DAY0

7월 7일부터 7월 12일까지 엘리베이터 교체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은 7월 10일. 집은 아파트 10층.

게다가 올해 7월은 유독 더웠다.

막막하면서도 한편으론 덤덤했다. 4주 동안의 미국여행이 이미 막막한데 이 커다란 막막바위 위에 자그마한 막막 조약돌 하나 더 얹기로서니 얼마나 차이가 나겠어?

해외여행이라고는 대략 십오년 전, 친구와의 일박 삼일 도쿄여행이 전부였다. 미국은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랜 여행도 처음. 그리고 내 옆에는 아홉살 딸이 내내 붙어있을 예정이었다.


“너무 빨리 가는 게 아닐까요?”

오십 일치 처방전 입력을 마치고 선생님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 걸요.”

나는 머릿속에서 밀려드는 어떤 생각들을 최대한 막으며 일부터 건조하게 대답했다.

내가 비행기표를 예매한 건 4월. 엄마로부터 고모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나서였다. 이번이 세번째 수술이었다. 수술경과는 다행이 좋았다. 그러나 여든에 가까운 나이.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도 놀랍지 않을 상태였다. 


더늦기 전에 이번에는 꼭 가야겠구나 

그동안 이십년 넘게 고모는 통화를 할 때면 언제 한 번 와야지 하고 운을 떼셨다. 꼭 가야죠. 저도 진짜 가고싶은데 시간이 안나네요. 가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눈 앞에 쌓여있는 일들을 나중으로 미루고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도 직장다니는 친구들처럼 연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연차를 아껴모으고, 여행계획을 짜고, 출발까지 남은 날짜를 카운트다운하는 동안 얼마나 설렐까. 계획대로 진행될 때 느낄 성취감과 안정감이라니.


한편, 나의 지난 날을 떠올리니 다음과 같은 가사가 떠오른다.

첫 인생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나의 인생은 한국의 장마철 고속도로였다. 

아니, 현재진행형이므로 였다가 아니라 이다가 더 어울리겠군.

햇빛이 쨍쨍나는 길을 달리다가 일 킬로미터도 채 못가서 누가 양동이로 쏟아 붓는 것처럼 비가 내린다. 이쯤되면 비를 맞는 게 아니라 비에 두들겨 맞는 정도가 된다. 차선도 안 보여서 비상등을 켜고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러다 빗속의 운전에 적응될 때쯤엔 이럴 수가, 

반대편 차선에서 자신의 키만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덤프트럭이 눈에 들어온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속도를 더 줄이고 제발 아무 일도 안일어나길 빌며 그자리에서 꼼짝없이 물세례를 당하는 것 뿐이다.  

여기에 아이까지 타고 있다면. 두 시간에 한 번 씩 휴게소를 들러야하므로 도착예상시간은 이미 의미를 잃은지 오래.


그래도 올해부턴 날씨가 갤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내심 기대했는데 시동을 걸고 큰길로 나가 속도를 내기도 전에 도로가 무너졌다. 거대한 싱크홀이 입을 벌리고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로 추락하는 동안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던가, 아님 울면서 비명을 질렀던가.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 그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티는 게 전부였다. 나의 일상은 올스탑되었다.

나는 그저 시간이 운전하는 견인차에 실려 모든 생각과 모든 기분을 틀어막고 매일을 흘려보냈다. 목적지를 설정해서 뭐한담? 어차피 도착도 못하는데? 이젠 내가 타고 있는 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였기에 엘리베이터 못 타는 거 그까이 거. 내 인생 언제 쉽게 풀렸다고.

다이어트 하려고 일부러 천국의 계단도 타는데 운동되고 좋네. 평소에 나는 또래보다 힘이 세다고 믿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공사 시작 전, 나는 캐리어 두 개를 차 뒤쪽에 미리 실었다. 

짐은 출발 전 날 큰 가방에 넣고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면 차 안으로 모두 옮길 수 있겠지. 그러고나서 여행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기만 하면 되겠네.

혹시 모르니 이틀 전부터 짐을 싸자.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런 나, 이제 어쩌면 계획대로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된지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인스타그램 어디선가 본 동영상이 떠올랐다.

‘여러분, 여러분을 제일 혹독하게 다그치는 존재가 사실 자기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 스스로를 혼내지 말고, 다독여주세요. 본인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본인을 사랑해 주겠어요.’

그래, 나는 나한테 좀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아니라고! 그거 그럴 때 쓰는 말 아니라고!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자니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미래의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나를 목격하고 간곡하게 말려도 보고, 악을 쓰며 경고도 해보지만 이게 무슨 소용있겠어요.

내가 간과한 점은, 48시간 동안 나는 짐만 싸면 되는 게 아니라-

아침, 저녁 선율이 밥을 챙기고, 학원과 방과후수업 선생님들께 며칠부터 며칠까지 못간다는 연락을 돌려야 하고, 결석계 서류를 작성해서 학교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다. 이마저도 하루 늦어서 나는 서류를 파일에 끼워 책가방에 넣으면서 선율이에게 말했다.

“선생님한테 엄마가 늦게 써줘서 늦게 내는 거라고 말해, 알았지”

“그럴거야”

선율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하긴, 내가 제때 못챙긴 건 맞으니까.


선율이를 학교에 보내고 내 몸의 연료통에 커피를 콸콸콸 쏟아부었다. 신발을 신은 뒤 가방을 크로스로 매고 문밖을 나섰다.

어디, 천국의 계단 한 번 타볼까?



아니오, 그것은 지옥의 계단이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