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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Oct 27. 2024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쳐맞기 전까진 PART2

DAY0

시지프스가, 근육질로, 그려져 있던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쓰읍- 후우- 

지하 주차장에 세운 차에 가방 속 짐을 옮겨 싣고, 빈 가방을 목에 걸고, 계단 오르기 과정을 세번째 반복하던 중 시지프스가 떠올랐다. 그 아저씨는 신화 속 인물이니까 체력이 떨어지는 일도 없겠지. 인류가 꿈꾸는 무한동력이 그리스로마신화에 있었구나.

아니, 근데, 후우- 후우- 시지프스는 신들을 골탕먹인 죄로 벌을 받은 거지만, 나는, 왜, 신들은 왜 ,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시지프스는 코어가 매우 발달해 있었겠지. 그리고 디스크도 멀쩡해서 허리를 구부리고 몸에 힘을 싣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을 거야. 현실 속 김서연은 그렇지 못했다. 정수리 위에 물동이를 인 조선시대 여자처럼, 짐가방을 머리에 얹고, 허리디스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꼿꼿한 자세로 계단 한 칸씩만 발을 내딛어야 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구르다 다칠테니까. 물론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면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가방에 한꺼번에 짐을 많이 넣을 수도 없었다. 무게를 버티려고 무의식적으로 허리에 힘을 주다가 디스크가 더 새어나오기라도 하면 내일 비행기 안에서 11시간 동안 서있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다섯 번쯤 왕복하고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98%의 체력이 방전됐지만 다행히 오른쪽 검지 한마디를 움직일 만큼의 기력은 남아있어 배달앱을 열어 나의 소울푸드, 나의 에너지부스터, 치킨을 시켰다. 치킨이 올때까지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한 달 뒤에야 집에 돌아오기에 출발 전 오늘까지 해놔야 할 것들이 집안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런 일들의 특징은 중요하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제 때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불편해지거나, 때론 예상치 못한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대체로 그런 돌발상황은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법이 없음을 여러번 겪어봐서 알기에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하기 싫어하는 나를 내가 멱살잡고 끌어와서 잡무 앞에 앉혔다. 

그나마 치킨이 옆에서 날 위로해줬어, 흑


이런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는 내가 공들여 만든 순서도를 무너뜨렸다. 체력과 정신력이 동시에 줄줄 세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생각할 힘이 바닥났다. 이젠 말그대로 정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일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미국드라마 속 인물처럼 동네에서 조깅하는 멋진 나를 상상하며 트렁크의 반을 운동복으로 채움. 그러나 한 번도 달리지 못하고, 즉 한 번도 꺼내지 않고 고스란히 들고 옴.

미리 꺼내어 놓은 반팔티셔츠 대신 종아리 아래까지 오는 원피스 여러 벌을 가방에 넣음. 짐을 풀면서 ‘이건… 왜…?’라며 어리둥절해 함. 

결국 캐리어 한 개를 더 끌고 내려옴.


출발 당일, 몇 시간 못자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났지만 인천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도 짐싸기는 계속 됐다. 그러다 멀미가 나서 짐싸기를 멈추고 아이고, 나도 이젠 모르겠다 하곤 트렁크더미 옆 빈 공간에 몸을 구겨넣고 누웠다. 눈을 감고 눕는 것. 이것만이 방전된 나를 충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잠이 든 것도 아니다.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 휴대폰이 꺼지는 게 아닌 것 처럼. 물론 전원을 끄면 더 빨리 충전되기야 하겠지만.

누운지 이십 여 분 뒤에 공항에 도착했다. 9시 50분. 내가 탈 비행기의 체크인 데스크는 아직 닫혀있었다. 10시부터 연다고 써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메모앱을 열었다. 전날 작성한 ‘출국시 공항에서 해야 할 일 순서’라는 제목의 체크리스트를 열어 일일히 항목을 확인하며 써놓은 일들을 수행했다. 환전하고, '환전' 항목을 목록에서 지우고, 예약해 두었던 와이파이 도시락을 받고 '와이파이 도시락 수령' 항목을 목록에서 지우는 식으로 말이다.

메모에는 해당 장소의 위치도 포함돼 있었다. 나는 심한 길치라 넓은 공항을 이리저리 헤매느라 제 시간 안에 해야할 일들을 다 못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순조롭게 일을 끝내고 온라인체크인을 미리 한 승객을 위한 줄에 섰다. 그러나 다른 창구에 비해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딱히 빠르진 않았다. 

아니, 어차피 공항에서 또 줄설 거면 온라인체크인은 왜 만들어놓은 거임?


예, 저같은 사람이 있거든요.

몇 줄 위로 올라가면 ‘짐싸기를 멈추고’라는 써있는 부분이 있다. ‘끝냈다’가 아니라 ‘멈췄다’라는 표현에 주목해 주시길. 왜 저는 끝냈다 대신 멈췄다고 했을까요?

캐리어 하나가 무게한도를 초과해서 짐을 다시 싸야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네.

대기줄을 빠져나와 저울 옆으로 가서 캐리어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뚜껑을 열었다. 이 캐리어에서 저 캐리어로, 저쪽 가방에서 이쪽 가방으로 물건들을 서너 번 옮기고나서야 비로소 짐들을 컨베이어벨트 위로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음의 짐도 함께.

출국수속을 완료하고 나니 탑승시간까지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기진맥진한 와중에 선글라스 사야한다고 여러 개를 껴보고-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결국 안 삼, 마음샌드는 여기 아니면 못 산다며 기어이 파리바게트까지 들리는 엄마를 선율이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엄마, 나 다리 아파. 늦겠어 빨리 가자”

“미안해 미안해, 봉투 무거운데 잘 들어줘서 고마워 내사랑.”


내색은 안했지만 선율이는 처음가는 외국여행에 몹시 들떠있었다. 

그동안 같은 반 친구들이 베트남이나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로 여행가느라 결석할 때마다 선율이는 내게 와서

“엄마 누구누구는 어디어디 가서 오늘 학교에 못 온대”

“오늘은 누구누구가 어디 여행가서 사온 거 학교에 가져와서 나눠먹었어”

같은 얘기를 종알대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응, 그렇구나.” 또는 “맛있었어? 무슨 맛이었는데?” 정도로 별 감흥없이 반응했었다. 선율이가 그들을 무척 부러워했다는 건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오월 말에 영어학원에 들렀을 때 원장님이 “선율이 여름방학때 미국 간다면서요. 온 친구들이 다 알아요”라고 말하거나-여행은 칠 월이었으니 이미 몇 달 전부터 자랑했던 셈이다,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가 “너 선율이하고 방학 때 미국 간다며.” 라고 내 소식을 나한테 전해줄 때에서야 깨달았다.

진짜 부러웠구나.


나는 평소에 나의 이번 생은 망했지만 선율이의 이번 생은 망하면 안되지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나 혼자 가는 여행이면 중간에 헤매거나 지쳐 쓰러지거나 심지어 중단해도 상관없었지만 선율이의 미국여행은 그러면 안되잖아.

선율이의 짐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으므로, 선율이 껀 빠짐없이 가져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다. 나는 낸시가 보내준 일정표를 보면서 여기선 이게 필요하겠지? 저기선 그게 있으면 편할 거야, 여러가지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준비물 목록을 적어나갔다. 출국일이 다가올 수록 점점 커진 압박감에 짓눌렸지만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여행 이 주 전쯤부턴 영어 소리에 익숙해지라고 집에 영어동영상을 틀어놨었다.

며칠이 지나자 선율이가 말했다.

“엄마, 영어를 계속 들었더니 속이 울렁거려”

“네가 울렁거리더라도 엄마는 울렁거리면 안되지 않겠니?”   

단둘이 다녀도 불편함이 없도록 영어를 준비하긴 했는데 이건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어떨지.


이제 곧 이륙한다는 안내멘트가 들렸다.

“엄마, 나 무서워”

선율이는 나의 왼쪽팔을 감싸 안으며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뭐가 무서워. 엄마가 옆에 있는데. 걱정하지마. 엄마가 항상 지켜줄거라고 얘기했지?”

선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가 몇 번 덜컹대더니 창문밖 풍경이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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