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다채로운 풍미의 토마토 고항 (feat.아메리카노)
봄의 기운이 맴돌긴 하지만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산울림소극장 근처 카페에서 팔던 토마토 고항. 그리고 그 카페로 날 초대해 준 언니. 언니와 밥을 먹은 지가 꽤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위해 동두천에 취재를 나간다는 통화 이후로 연락이 없다가 돌연 뇌에 문제가 생겨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언니를 처음 본 건 2013년 가을이었다. 난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영상작업을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 틈에 생뚱맞게 기획을 하겠다고 온 글쟁이였다. 그리고 그런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 또 다른 앨리스가 있었으니 바로 언니였다. 어색한 웃음 하나로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대학원 시절의 난 시트콤 속 주인공 같았다. 자취방 화장실에 갇혀 119를 부르기도 했고, 현관 디지털 도어록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1시간 넘게 잠옷 차림으로 주인아저씨를 기다리기도 했고, 세탁기 호스가 노후되어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날 때면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는 특유의 호들갑스러움으로, 특유의 하이톤으로 나의 해프닝을 정말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절망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걸면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웃어대며 전화를 끊곤 했다. 이래저래 '다 괜찮다'는 것이 언니의 지론이었고, 묘하게 언니의 '괜찮다'를 들으면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벌써 2년 전 일이다. 자취방이 물바다가 되어 밥솥이 고장 났을 때 밖에서 밥을 먹을 운명이라며 언니는 날 불러냈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언니는 학교를 휴학하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한 달도 넘게 정처 없이 떠돌다가 서울로 돌아왔는데 문득 이 카페의 토마토 고항이 먹고 싶다고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토마토 고항의 색이 참 예뻤다. 하얀 밥에 소스를 비벼 한 숟가락 입에 넣고 보니 언니 말대로 '집밥'같은 느낌이 여실히 들었다. 토마토에 이렇게 많은 맛이 담겨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원래 카레를 좋아하긴 하지만 토마토가 주재료인 카레는 처음이었는데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맛이 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언니가 먹고 싶다던 음식에선 '익숙한 매력'이 느껴졌다. 일상처럼 편안하지만 결코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순 없는 맛. 같이 나온 아삭하고 새콤한 샐러드는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가볍고 경쾌한 매력의 맛이었다. 입가심으로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나니 노곤해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퇴원해서 부모님의 병간호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언니는 9월 즈음 유럽을 갈 예정이라고 했다. 언니는 늘 무리하며 살았다. 여행에 가서도 '마감'에 치였더랬다. 지난 날 언니의 고된 생활은 하나의 여행처럼 느껴진다. 고된 여행에서 돌아와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한 언니와 토마토고항 한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새로운 곳으로 새롭게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젠 카페에서 토마토고항을 팔지 않는다던데 이를 대신할 식당을 부지런히 찾아두어야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를 위한 식탁을 정성껏 마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