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이를 위한 식탁

먹을수록 매콤하고 씹을수록 쫄깃한 뽈떼기찜

by 노크노크
먹을수록 매콤하고 씹을수록 쫄깃한 뽈떼기찜


여전히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고3인 동생은 세상 짐을 모두 짊어진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수시 원서 접수가 거의 갈무리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모의고사 성적이 맘처럼 잘 나오지 않아 동생에게 수시전형은 수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누나만 오면 종알종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던 막둥이 동생이 기운 없이 축 늘어진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입맛이 없다고 요 며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으니 괜히 더 안쓰러웠다. 어떤 음식이 좋을까. 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냐 물어도 반응이 심드렁했다.


뽈떼기찜!


이거다. 동생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동생은 어릴 때부터 뽈떼기찜, 해물탕 등을 좋아했다. 아저씨 취향 같다고 동생을 놀리면서도 가족들은 모두 즐겁게 그릇을 비워내곤 했다. 365일 자습을 생활화하는 고3과 외식을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지만 마침 동생 학교 근처에 뽈떼기찜을 잘 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점심시간에 맞춰 뽈떼기찜을 먹으러 갔다.


매콤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먼저 나온 밑반찬을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괜히 더 배가 고파올 무렵 뽈떼기찜이 나왔다. 가장 살이 많이 붙은 조각을 동생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동생은 아삭한 숙주와 짭짤한 김을 얹어 한 입 야무지게 먹었다. 누가 퍼주지 않아도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말없이 열심히 먹었다. 나 또한 계속되는 더위에 지쳤던 입맛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삭한 숙주의 식감과 먹을수록 깊어지는 매운맛 그리고 부스러지지 않고 쫄깃한 뽈떼기살에 동생은 무장해제를 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이러쿵저러쿵. 원서를 쓰는데 어쩌고저쩌고. SNS 게시판에 이런 게시글이 있었는데 조잘조잘. 볶음밥을 먹을 때쯤엔 내가 볶음밥을 먹는 건지 동생 녀석의 수다에 달달 볶이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이다. 무기력한 동생에게 강력한 미각의 자극이 조금이나마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도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가고 싶다는 녀석의 말에 웃음이 난다. 입맛 없다는 말은 한동안 듣지 않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삶이 무기력해지는 날엔 매운 음식이 생각난다. 콧물과 땀을 질질 흘리며 매운 것에 집중하다 보면 묘한 전투의지가 생겨 버린다.


조만간 무기력한 사람들을 모아서 한 번 먹고 반해버렸던 맵디 매운 낙지집에 가야겠다. 본격적인 춘곤증이 찾아올 무렵 게릴라 원정대를 모집해야지. 무기력을 빙자하여 혼자 가서는 먹을 수 없는 여러 토핑들을 모두 주문해야겠다. 오랜만에 묵직한 소맥도 제조해야지. 오려다가 만 봄은 도대체 언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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