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는 추억을 돋우는 강력한 힘이 있다
나는 왜 식탁을 추억하게 되었을까
업무 때문에 만나 밥을 먹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간관계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회의 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식사 자리에서 술이 몇 잔 오가고 나서야 말문이 트이는 사람들이 많아 회식을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식사 자리에서 일 얘기보다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좋을 이야기들이 더 많았지만 그 자리를 쉽게 벗어나긴 어려웠다.
의미 없는 식사자리가 이어지자 내게 남는 건 '음식'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나오면 핸드폰을 꺼내 음식 사진을 찍었다. 막내답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고 시간이 지나자 음식 사진 찍기는 찍기 싫은 음식까지 사람들의 배려를 받으며 찍어야 할 정도로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사진을 찍고 음식에 집중하다 보면 싫던 자리도 웬만큼 견딜 수 있었다. SNS 계정에 하나씩 사진을 올리다 보니 꽤 많은 사람들과 음식을 먹었구나 싶어 뿌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날을 잡고 앉아 올려둔 사진들을 보는데 함께 먹었던 사람 그리고 함께 나눈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억지로 끌려간 자리였는데 의외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상대방의 의외의 면을 발견해서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고, 음식 맛은 평범해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작은 이자카야에서 나던 간장 베이스의 전골 냄새와 상대방과 나눈 대화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기도 했다.
식탁이 그렇다.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이 그렇다. 집중할 것은 음식뿐이라고 생각해도 이내 음식을 함께 나눈 사람 그리고 함께 나눈 이야기가 그 시간 속에 깃들어 버린다. 양념이 골고루 밸 때 음식의 완성도가 높아지듯 함께 음식을 나눈 사람이 좋으면 식탁의 퀄리티가 높아진다. 물론 혼자 먹을 때도 그날의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메뉴를 선택하면 만족도가 올라간다.
함께하는 것이 의미 없어 시작한 음식 사진 찍기는 이내 함께 식사한 이들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려고 한 적도 없는데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먹는 건 즐겁다. 혼자 먹는 것도 좋고 함께 먹는 것도 좋다. 음식을 보며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도 즐겁다.
평일 오후 4시, 토요일 오후 2시
내 메신저가 가장 바쁜 시간이다. 대부분의 메시지가 자신의 위치를 말하며 맛집을 추천해달라는 내용이다. 내게는 맛집을 추천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기준에 맞춰 맛집을 추천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만족하면서, 어떤 사람은 의아해하면서 나의 맛집 추천을 받아들인다. 며칠 뒤면 어김없이 그 집 음식이 정말 좋았다며 우리도 언제 식사나 한 번 하자고 연락이 오는 걸 보면 나의 추천이 그리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누구랑 먹어?
맛집을 추천해주는 첫 번째 기준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이다. 혼자 먹으러 가기 위해 '검색'도 아니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물론 '혼자' 먹을 기막힌 장소를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동행과 함께 갈 장소를 물어본다. "이런저런 사람과 이러저러한 이유로 밥을 먹기로 했다."는 대답에 몇 군데 식당이 떠오른다. 두근두근 첫 데이트를 한다는 그에게 추천하는 맛집과 필사적으로 가성비 좋은 회식 장소를 찾아야 하는 막내에게 추천하는 맛집은 너무 다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마치 나의 일처럼 상대방의 상황에 이입해서 맛집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은 비가 오니깐
맛집을 추천해주는 두 번째 기준은 날씨다. 같은 더위라도 유난히 습한 날씨가 있고 같은 추위라도 유독 서늘한 날씨가 있다. 미지근한 날씨와 애매한 날씨는 묘하게 다르고 사람의 몸은 기가 막히게 이 차이를 느낀다. 추운 날 차가운 음식을 먹고 싶을 수도 있고, 더운 날 뜨거운 음식을 먹고 싶을 수도 있지만 날씨에 어울리는 음식을 고른다면 훨씬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파스타를 먹으러 가기로 한 날,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면 아늑한 이자카야에서 뜨끈한 나베로 과감하게 메뉴 변경을 할 필요도 있다.
기분이 어때?
맛집을 추천해주는 마지막 기준은 그날의 기분이다. 굳이 묻진 않지만 앞의 두 기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에게 맛집을 묻는 상대방의 기분이나 동행할 이의 상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분위기'에 예민한 동물이다. "밥 한 끼 먹는데 '기분'이 무슨 상관이냐, 맛있으면 된다."라고 하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만 나의 경우 '음식'은 그날의 기분과 큰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믿는 편이다.
사람들이 맛집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귀찮지 않냐고 지인이 물었다. 귀찮다니! 음식을 이야기하는데 귀찮다니! 음식을 매개로 오랜만에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그들의 안부를 물을 수 있어서 즐겁기만 하다. 어서 자신과도 식탁의 추억을 쌓으러 가자고 재촉하는 이들이 있어 행복하다.
음식에 있어 난 오버스러운 편이다. 소중한 사람과 먹을 음식이라 그 기준이 올라가고 어색한 사람과 먹을 음식이라 조금 더 신경 쓰게 된다. 비싼 음식이라고 좋은 음식이 아니다. 추억이 담긴 음식, 추억을 담을 음식을 잔뜩 먹고 싶다. 다이어트는 내일로 미루겠지만 음식을 보며 떠올릴 추억이 많아질 것이다. 혼자, 함께 그리고 다 같이 맛있는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 식탁의 추억을 떠올리며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메인 이미지 출처 : huab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