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너'와의 관계를 알면서도 모르기
만성피로 자가진단을 했다. 나는 만성피로자다. 자고 또 자도 쉽게 피로가 풀리지 않고, 목 어깨를 중심으로 근육통도 유발된다. 쉽게 지치고 눈도 흐리멍덩하게 초점을 자주 잃는다.
무엇보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귀찮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150만 원가량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급하게 집주인과의 갈등을 끝낸 것도 몸이 좋지 않아서,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서 였다. 어쩌다 생겨버린 친구 사이의 오해도 풀 의욕이 없어 그냥 그 틈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었다. 갑자기 몸이 피곤해져 버려서 약속을 취소하는 일도 많아졌다. 내 머리가 몸을 이기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침대와 한 몸이 된다. 그와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 또한 만성피로에 의한 게으름 때문일까? 난 그저 판단을 유보하고 상황에 모든 걸 맡겨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말의 미련일까.
그와의 관계를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원래 알던 사이. 1년 정도 함께 일하며 호감을 느꼈지만, 당시 그에게는 애인이 있었다. 나도 이런 저런 일에 치여 '감정' 같은 것보다 당장 내 앞에 떨어진 일들을 해치우기 바빴다. 가끔 그와 만나 술을 마시곤 했는데, 그냥 일 이야기를 하거나 비슷하게 공유하는 취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지는 정도였다. 사실 둘 다 피곤에 취해, 술에 취해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었다. 내가 먼저 일을 그만두고 이직을 해서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출근길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의외의 장소였다.
우연을 계기로 다시 연락을 했다. 그도 이직을 했고, 힘든 '신입'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나의 경우 워낙 프리랜서로, 계약직으로 자유롭게(라고 말하고 불안정이라 쓴다) 일을 해와서 재택 근무를 하거나 사무실을 옮겨 다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이웃 회사를 다닐 뻔했던 우리는 나의 계약 종료와 함께 위치상의 연결고리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딱히 연락을 주고받을 말도 없었다. 시답잖은 취미사 공유나 힘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밖엔... 사실 바로 이전 직장에서 일할 때 알게 된 분과의 관계를 고민하던 중이라 (내 마음인데 어때 참조) 간혹 톡을 주고받는 그와의 관계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하고, 이른 저녁 만나 자주 가던 술집에 갔다. 몸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술이 금세 취했다. 그래도 한 때 호감을 가졌던 사람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술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도 꽈악 움켜쥐고 있던 이성의 끈을 단숨에 놓아버리고, 그동안은 꺼내놓지 않았던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꽤 오래 만난 연인과 헤어졌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를 했다. 취향이라던가 뭐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들.
우리는 제 3자가 들었으면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취향을 가지고, "어머 이런 사람 흔치 않은데...!"라며 서로의 취향을 마치 특별한 것처럼 이야기하며 묘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모든 연애의 시작이 오직 나에게만 그가 특별해지고, 오직 그에게만 내가 특별해지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술에 취해 이성의 끈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무심한 척 했지만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호감 때문인지 그 날 저녁 우리는 서로를 꽤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공적인 일로 알아왔던 그간의 시간들은 전혀 의미가 없었을 만큼 빠르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자주 가는 술집이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자리가 아니라 나란히 앉아야 하는 그 자리는 꽤 섹시한 구석이 있었다. 서로의 취향을 특별히 여겨주고, 일에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다가 덜컥 손과 손이 닿았다. 막차를 타야 하는 아쉬움에 술집을 나오다가 이상하고 묘한 분위기에 입도 맞췄다. 혼자 하는 사랑마저 시작하기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내는 것을 주특기로 삼아온 내가 술의 힘을 빌려 순간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버렸다.
다음 날, 전에 없던 돌발 행동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찬 오전을 보내고 꽤 오랜만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던 것을 술 때문에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오후를 보냈다. 모순적인 하루의 끝 그에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리는 어영부영 연락을 이어갔다. 나는 내 일에 치여서, 신입인 그는 회사 일에 치여서 바쁜 하루들을 살아냈고 치열한 하루의 끝 일기를 쓰듯 연락을 주고받았다.
누구 하나 선을 넘지 못했다. 퇴근 후 잠깐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영화도 봤지만 그날의 묘한 감정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미적지근했고, 애매했다. 우리는 서로 다정하지만 말 그대로 다정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난 느끼고 있었다. 그도 이 미적지근한 관계 위에 서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이전 같았으면 혼자 마음의 정리를 하든 그에게 따져 묻든 이 관계를 '정의' 내리거나 마무리하려고 했을 텐데 벌써 3주째 난 이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것일까. 아니면 누적된 피로 때문에 이마저도 귀찮아진 것일까.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자 친구들은 남자 쪽에서 3주나 이렇게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나에 대한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어서 끝을 내버리라고 부추겼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이 더 성화를 부렸다. 그렇지만 너무 피곤한 나는 재촉하지 않고, 지극히 하루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지금의 애매한 관계에 힘을 가하고 싶지 않다. 미지근한 관계임을 너무 잘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니다 '척'도 아니라 그냥 모르기. 어영부영 이대로 어색하게 끝이 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아니면 어영부영 그가 내 삶을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은 내 맘이고, 이런 내 맘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의 맘이란 걸 이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당분간 마음 가는 대로 방치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건 분명 썸은 아닐 것이다. 미지근한 관계를 알면서 모르기 그냥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새로 할 연애는 훨훨 불타오르는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만성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내 마음의 변화 때문인지 이 미지근한 관계 위에서 길을 잃은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그의 맘은 혹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맘이니깐 내버려두기로 한다. '썸'이다, 아니다. 썸은 좋다, 나쁘다. 어장관리다, 아니다 등 '규정짓기'가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난 그냥 이 상황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주관적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 특히 남녀 관계에 있어서 본인이 문제 삼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애매한 관계를 끝내고 싶은 순간이 오면 어쩐지 우리 관계는 이미 결론이 나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