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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Oct 18. 2015

아픔의 무게

너에게만 가벼운 내 아픔의 무게 

꽤 오래 전의 일이다. 화장을 지우려고 거울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너무 오랜만에 눈물이 나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계속 쳐다봤다. 닭똥처럼 흐르던 눈물은 곧 굵은 줄기가 되었고, 쉽게 멈추지 않았다. 리무버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아이라이너는 흐릿해졌고, 원래 짙게 바르지도 않는 BB크림은 거의 다 지워졌다. 이렇게 된 마당에 본격적으로 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 눈물이 계속 흘렀다. 서럽게 울었다. 감정의 찌꺼기를 눈물에 씻어 내리기 위해 난 조금 더 울어야 했다. 덩달아 매일 렌즈를 끼고 모니터를 봐서 푸석푸석 가뭄을 느끼던 안구에 단비가 내린 느낌도 들었다. 반가운 눈물이었다. 비록 눈물의 시작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잘 생각해봐, 넌 조직생활엔 어울리지 않을걸?

아무리 프리랜서로 오래 활동해왔고, 팀 작업보다는 혼자 작업하는 일이 많았던 나라고 하지만 만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소리를 하나 싶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조직 생활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은 일을  인수 인계하던 선배였다. 하루 공들여서 전체적인 맥락과 그 절차를 설명해줬더라면 조금 더 쉬웠을 일을 매뉴얼 하나 던져주고, 매뉴얼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며 모른 체 했었다. '가르쳐주기'보다는 '어디 너도 고생해봐' 이런 느낌이었는데, 낯설기 만한 직무에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나는 이리저리 혼자 부딪혀야 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내가 처한 상황을  힘들어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이를 감추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내 눈물을 목격한 날, 선배는 내게 조직 생활이 어울리지 않은 사람 같다고 했다. 그러니 공부를 조금 더 하든, 원래 하던 대로 프리랜서 일을 하라고 했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당시의 난 C.C(참조메일)의 의미도 몰랐고, FW(포워딩)을 언제 해야 하는지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공유하고 보고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정말 '함께' 일하기엔 부적절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에게 맡겨진 '일'을 잘 해낸다고 하더라도 함께 손발을 맞춰 나가야 하는 프로젝트에선 절차와 시스템을 모르면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스템에 관한 문제는 정말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업무 교육을 받았더라면 보고 체계나 공유 절차 혹은 조직의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설령 그 과정이 없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직접 부딪혀 보니 이런 문제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배가 직장을 떠나고 난 일에 적응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선배를 제외하곤 없었으니  별문제가 없었고, 일이 손에 익고 업무절차를 파악하고 나니 일이 어렵지 않았다. 막내의 역할이라 귀찮은 일도 많았지만 다른 선배들과 대화를 통해 적절히 조절해가면서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난 조직 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당시 내 아픔의 무게가 유난히 무거웠던 건 시시콜콜 자신의 과거 상황과 비교하면서 나를 평가하는 선배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땐, 이것 보다 훨씬 심했어. 넌 진짜 편하게 하는 거야.", "넌 진짜 대접 잘 받는 거야. 나 때는 이것만 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새웠어. 그것도 혼자서.", "저분이 나이가 드셔서 지금 이 정도지, 처음에 어땠는 줄 알아?", "그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그런 건 얼마든지 쉽게 하는데...", "야! 지금 그게 뭐라고!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유난이야?", "어차피 네 일 네가 선택하는 거지만 내가 볼 땐..." 이런 식으로 자신이 지나온 아픔에 비해 나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선배의 태도가 무척 숨 막히고 힘들었던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infuture.kr

직장을 옮기거나 프리랜서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나서 팀 작업을 할 때마다 늘 윽박지르며 자신의 고통스럽던 과거를 자랑하고 안정된 현재를 으스대는 선배 유형을 한 명씩은 꼭 마주치게 된다. 설상가상 그런 유형은 내가 그 앞에서 도움을 청한 적도 없고, 어려움을 토로한 적도 없는데 괜히 내 자리를 어슬렁거리면서 "난 신입 때 네가 맡은 규모의 행사를 혼자서  두세 개씩 했어. 뭐가 어렵다고 징징거려.", "이런 건 금방 하잖아.", "나 때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어.", "네가 바닥을 쳐본 적은 있니? 네가 바닥이 뭔 줄 알아?" 등등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런 유형의 선배들의 또 다른 특징은 업무적으로는 내게 단 하나의 도움도 주지 않고 '말'만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차근히 알려주는 선배들은 결코 현재 내가 직면한 아픔의 무게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아픔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덜어내 줄 수 있는 것을  말없이 덜어준다. 

이미지 출처 : marketingland.com

세상에 같은 종류의 '아픔'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아픔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천차만별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그 아픔을 절대 같은 무게로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에게는 새털처럼 가벼운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가 된다. 나는 누군가 열심히 걸어온 삶의 자취를, 혹은 열심히 견뎌내고 있는 삶의 무게를 무시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이미 내가 지나온 길이라도 혹은 내가 견뎌낸 무게보다 훨씬 가벼워 보이는 무게라도 그것은 누군가의 현재를 이루는 소중한 시간들이고, 내가 지나온 시간과 아픔의 무게와는 절대 같을 수 없기에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내가 만나 온 다른 멋진 선배들처럼 상대방이 느끼는 아픔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 무게를 덜어줄 '행동'을 해야겠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라도 '지나간 아픔'이고 이제는 '가벼운 무게'의 아픔일지라도 다시 겪으라고 한다면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할 것 아닌가. 지금 상대방은 바로 그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난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 상대방의 아픔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들여다보고 조용히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누군가의 아픔의 무게를  가늠하기보다 아픔 그 자체를 안아주고 싶다. 더불어 전과 같이 누군가 내 아픔의 무게를  저울질하면서 상처를 주려고 한다면 난 되도록 모르는 척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그는 눈금만 볼 수 있고, 마음은 볼 수 없는 가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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