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할 말은 누가 다 삼켰을까
최근 내 상태를 네 글자로 설명하면 이렇다.
할많하않
(할 말은 많으나 하지 않겠다)
머릿속을 맴맴 돌거나 혓바닥까지 하고 싶은 말이 차올라도 다시 목구멍으로 가라앉히기를 몇 달째 반복한다. 마치 화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마음에 불덩이를 안고 사는 느낌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큰 일도 없고, 현재 상황에 엄청난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JTBC 손석희 앵커는 앵커 브리핑(16.08.16)에서 춘원 이광수의 소설 '흙'(1932)의 "청년은 시잌한 모양을 내고 싶다"란 구절을 인용하며 '할많하않'이 자신의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젊은 세대의 시잌(시크)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고 소개하기도 했었다.
언어가 사회를 반영하고 결국 문화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면 젊은이들의 좌절과 절망 역시 언어를 제거한다고 해서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지요. 1930년대. 신문물을 동경하고.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청년들 그 시잌하고 싶었던 청년의 후예들인 80년 후의 청년들은 아마도 요즘 나온 신조어로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JTBC 손석희 앵커의 앵커 브리핑 中
젊은 사람들의 현실과 좌절감은 자연스럽게 언어에 반영되어 왔다. 손 앵커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를 제거한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좌절과 절망이 사라지진 않는다. 대한민국 모든 가정을 위협한 IMF 시절 생긴 생선 시리즈(명태, 조기, 동태, 황태)가 그랬고, 청년실업이 증가하면서 생긴 이태백,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불공정한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생긴 갑질, 수저론, 헬조선 등의 언어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할많하않이란 단어는 어떤 이유에서 발생했을까. 오늘도 할많하않을 외치는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개인의 손을 벗어난 어떤 고질적인 문제로부터 '할많하않'의 상황이 비롯된다는 것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할많하않의 '할 말' 덩어리가 입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설명하게 되면 내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질까 싶어 할말하않의 몇 가지 이유를 적어보았다. 대체 내 머리를 맴돌던 그 많은 할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땅콩 항공의 갑질 폭로가 연일 검색어 상위에 올랐다. 하루가 지날수록 드러나는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악행은 듣는 내가 다 분통이 터질 만큼 비인간적인 경우가 많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내부고발도 늘어나 오픈 채팅방을 두 개나 열어야 했다. 일각에서는 왜 이제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직원들을 비난하지만, 평범한 나는 비참한 꼴을 당하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건 분명한 '할많하않'의 상황이었다. 대한항공 일가가 땅콩 회항 때 이 사태를 폭로한 박창진 사무장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었는지 바로 옆에서 목격했을 그들이었다. 다음 피해자가 '나'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제발 그냥 나만 아니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을 것이다. 말을 한다고 해서 변할 게 없을 때, 오히려 수습만 불가능해질 때 할많하않을 외친다. 종각에 위치한 회사에 근무할 때 직장인들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회사 앞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할많하않을 실행하는 장면을 셀 수 없이 목격했다.
부장의 사소하(지만 기분이 굉장히 더러운)고 일상적인 말버릇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동료들끼리 그저 위로와 공감의 눈빛 교환을 보냈다는 친구 녀석은 퇴사를 했다. 처음엔 동기들끼리 모여 부장의 행패(?)를 잘근잘근 씹으며 힐링타임을 가졌지만 나중엔 누구도 이를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할 말은 많지만 할 일도 많고 말을 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단다.
친구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 시작한 '할많하않'이라고 했다. 대충 참아가며 일하기 시작하자 후배들이 부장에게 당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좀 참지, 왜 저렇게 일을 키우지?' 싶은 생각이 스치기도 했단다.
어떤 날은 손가락질을 했던 꼰대 선배들이 "요즘 애들 참 유난스러워"라는 말에 너무 자연스럽게 "아, 예 그렇죠. 일도 많은데"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했다고.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은 나날이었는데 친구는 건강이 악화되어 주변의 눈치를 꾹 참으며 병가를 내게 되었다.
3일 즈음 쉬자 '이제 그만 출근해야지?' 압박을 주는 부장의 다정한(?) 카톡이 왔고 바로 출근을 했다고 한다. 막상 출근을 하니 아픈 것도 참아가며 병을 키웠던 자기 자신이 멍청해 보일 만큼 회사는 평화로웠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회사에 하고 싶은 말들을 한 번에 잃었을 때 친구는 퇴사를 했다. 언젠가는 해야지, 언젠가는 바꿔야지 싶어 고이 담아두었던 말이 싸그리 사라졌고 비로소 회사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할많하않이 점철된 시점, 친구는 퇴사를 했다. 그 회사가 바뀌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어졌을 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실제 폰의 녹음 기능을 활성화하고 회의를 하는 대리님도 보았다. 물론 그 녹음 내용은 말을 바꾼 당사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증거물이 되고 말지만... 회사뿐 아니라 사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던 건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지나가지만 이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그냥 그 사람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디까지 말을 바꾸는지 관람해버리곤 한다.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는 상황이 아닐 경우에 더욱 빨리 할많하않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어쩌면 이 우왕좌왕한 상황 앞에서 지레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전투력 상실이 어쩌면 할많하않의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전투력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복합적이다. 끊임없이 말을 바꾸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뻔하게 거짓말을 하거나 체면치레를 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 아직도 본인 면피를 하기 위해 상사에게 멀쩡한 '내 미래'를 운운하면서 돌려 까기 하던 과장님을 잊을 수 없다. 내 걱정이 취미인 과장님은 나도 모르는 내 퇴사 소식을 여기저기 '모른 척해달라'면서 떠벌렸다. 너무 명백한 돌려까기임을 과장님 빼고 모두 알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커피나 하자며 옥상으로 불러내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내 걱정을 하곤 했다.
다른 이유로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과장님은 모두가 다 듣는 앞에서 "너는 여기저기 줄이 있으니 이직 정도는 문제없지?"라고 말했다. 오만가지 정이 떨어지면서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아도 돼서 행복했다.
그는 내 지인과 잘 알고 지냈고, 잘 나가는 내 지인이 나의 직장을 보장해줄 것이라며 떠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인과는 업계도 다르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도 거리가 멀었다. 내가 왜 그에게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발상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난 전투력을 잃어갔다. 근거 없이 말을 만들어 걷잡을 수 없는 소문을 만드는 과장님 덕에.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인 사람들. 쉽게 말을 바꾸며 타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어떻게 부풀려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모를 사람들 덕분에 난 20대 중반 이미 많은 전투력을 상실해버렸다. 다행인 건 그나마 이제 내가 상대방의 행동이 눈 가리고 아웅인 건지, 진심인 건지 조금은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인 사람들이 나타나면 마치 자신의 꼬리를 내어주고 도망치는 도마뱀같이 침묵을 통해 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가끔 억울함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지만.
지금처럼 할많하않의 이유를 나도 잘 모를 때 할많하않의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 이 경우는 나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고쳐 말하면 할많하않으로 점철된 내가 할많하않을 무기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자꾸만 뒤로 미룰 때 발생한다. 내가 말해도 어차피 바뀌지 않을 상황이라고 속단하거나,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며 가까운 길을 놔두고 먼 길을 빙빙 돌아가야 하는 경우다. 당장은 마음속의 평화를 찾을 수 있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계속 할 말을 삼키고 참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홀라당 까먹게 되고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분노만 둥둥 떠오른다. 실이 엉킨 걸 바로 풀지 않으면 더욱 얽히고설켜 결국 가위로 끊어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문제를 자꾸 외면하다 보면 문제의 원인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문제까지 얽혀 더욱 복잡해져 버린다.
나에게 고통이 되는 말들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만 이것들을 단순히 무시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땐 할많하않의 태도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자꾸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운 지금의 내가 바로 그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판단으로 삼키지 않아도 될 말을 삼켰거나, 굳이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똥을 무서워하면서 먼 길을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난 마치 습관처럼 별 일 아닌 것들에 '이너피스'를 외치며 모든 상황으로부터 날 과잉보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찾아온 연휴에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혀 청소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쓸 엄두도 나지 않았던 글을 끄적이며 혼잣말이라도 하니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다. 후우~
내일이 월요일인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에 글의 방향이 긍정적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내일이 되면 다시 화요병을 운운하며 부정적인 생각들을 우주의 기운을 다해 끌어 모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은 상쾌한 목구멍으로 새로 시작하는 한 주를 맞게 될 것이란 희망이 솟구친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