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 리뷰
지금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재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재판은 '관부재판'이라 불렸고, 재판의 원고는 한국 국적의 위안부, 근로정신대 피해자이며 피고는 일본 정부다. 관부재판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에서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시작되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던 이유는 바로 1990년 '일본군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라는 일본의 발표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된 역사의 한 구절이 될 뻔했던 일에 그녀는 용기를 나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日王(일왕)으로부터
직접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야겠다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는 부산 지역에 정신대 신고전화(당시 명칭)를 개설하였고, 1991년 10월부터 두 달간 8명이 신고하여 그중 4명이 관부재판을 시작하였다.
1992년 05월 29일 - 담당 변호사의 한국 방문과 3회의 걸친 피해자 청취 조사
1992년 11월 14일 - 변호인에게 소송 위임장 전달
1992년 12월 25일 - 시모노세키 지방 법원에 고소장 제출 (본격 재판 시작)
1992년 12월 - 5명의 원고, 고소장 추가 제출
1993년 09월 6일 ~1997년 9월 29일 - 총 20회의 구두변론이 진행
1994년 3월 - 1명의 원고, 고소장 추가 제출
1998년 04월 27일 - 판결
2001년 - 일본 정부의 항소로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패소
2003년 - 대법원에서 항소 기각, 패소 최종 확정
영화 <허스토리>는 앞에 역사가 되어버린 관부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관부재판의 원인인 일본군의 만행 또한 이제는 근현대사 시간에 배우는 역사 정도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역사(History)에 묻혀 있던 그녀들의 이야기(Her story)를 듣게 되었고 뒤늦게나마 아주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는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회원인 문정숙(김희애)이 자신의 사무실 한편에 정신대 신고센터를 차리면서 시작된다. 자발적으로 너무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정신대 신고센터를 차린 뒤부터 정숙은 피해자 할머니들과 6년간 동고동락하게 된다.
실제 있었던 일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기 마련이고, 당시의 상황도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견딘 폭력적인 언행과 곱지 않은 시선은 영화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증언을 거부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서는 정숙의 대쪽같은 성향이 할머니들과 부딪힐 땐 어느 쪽의 입장을 생각하든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숙과 변호인단이 어렵게 설득해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확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본에서 열린 재판장에서 할머니들은 원고가 아닌 타자처럼 취급받는다. 뱃멀미와 비행기 멀미를 이겨내며 할머니들이 힘들게 선 재판장에서는 발언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작 8분 정도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된다. 끔찍한 기억을 되뇌어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과정 자체가 할머니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영화에서도 배정길 할머니(김해숙)는 자신의 가족이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 재판을 그르치기도 하고, 재판을 포기했다가 다시 재판장에 서기도 한다.
20 차례의 구두 변론을 진행하면서 할머니들은 비로소 가슴에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그곳에 끌려가게 되었고, 어디를 떠돌았고, 어떤 상처를 받았으며, 함께한 친구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영화 속 할머니들의 증언과 사연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적지 않고 실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터뷰를 인용해 조금이나마 그때의 상황과 할머니들의 심정을 전달해보고자 한다.
열일곱 살이 말이 열일곱 살이지 많이 넘은 것도 아니고 열여섯 살 조금 넘은 걸 끌고 가서 강제로... 울면서 안 당하려고 해도 막 쫓아 나오면 안 놔줘요. 붙잡고 안나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이렇게 당했던 사람을 몰라요. 일본에서는 이런 적이 없대요. 없대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와요. 내가 죽기 전에, 내 눈 감기 전에 한 번 분풀이를 꼭... 말로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어요 -김학순 할머니
8월 27일 칼을 찬 군인이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 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을 죽였다. 못판에 박아 놓고 칼로 쑤시자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많은 여성들이 울자 일본군의 한 중위가 위안부X들이 고기가 먹고 싶어서 우나보다’하고 죽은 머리들을 가마솥에 삶아 그걸 위안부에게 먹였고 안 먹는 자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옥순 할머니
너무 피로해 오늘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팔에 구멍이 났는데 치료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몇 년간이나 그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정송명 할머니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없던 일처럼 하고 '조용히' 살아갈 것을 강요받았던 할머니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겨우 '살아남았지만' 전쟁 이후에도 그녀들은 손가락질을 받으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몸이 망가져 가족을 꾸릴 수 없는, 어렵게 가정을 꾸렸지만 그것이 더욱 상처가 된,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결코 당시의 상처만은 잊을 수 없는, 온몸에 난 칼자국으로 공중탕에 한 번 가보지 못한 할머니들의 인생은 그 일이 벌어지기 이전으로 돌려놓지 않는 이상 절대 보상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하듯 6년 간 총 10명의 원고(위안부 피해자 3인, 근로정신대 피해자 7인)가 참여한 이 재판은 위안부 원고들에게는 헌법상의 책무를 다하지 않아 위자료로 30만 엔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근로정신대원 원고들에게는 피해는 인정하지만 입법 의무가 없어 위자료 지불의 의미가 없으며 피고국에 공식 사죄할 의무가 없다고 명시해 일부 승소 판결로 종결되었다.
1990년대 후반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재판 중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거두었고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알려 전쟁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데 재판에 의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던 내가 들어도 가슴이 무너지는 판결인데 이 일의 실제 피해자들은 이 판결이 얼마나 아프고 원망스러웠을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역사도 그녀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혹은 관여한 바 없다고 무책임하게 대응하는 전범국의 변명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어떤 범죄가 '사건'으로만 조명되기보다 피해자 개인의 인권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충분한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할머니들은 다음세대를 위해 어렵게 용기를 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하루 빨리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로만 여기고 있었던 내 마음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고 '해결'이 아니라 '사과'가 필요한 그녀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영화를 보는 내내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개인적인 마음 때문에 리뷰가 다소 어두운 느낌이지만 영화는 밝고 희망차다. 좌절을 겪기도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도 되지만, 힘든 삶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현재를 살아가는 할머니들과 그런 할머니들을 묵묵히 도왔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응원과 희망을 마음에 품게 된다. 영화를 보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