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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Oct 01. 2015

지금은 맞고! 응?

홍상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고

난 살면서 취한 적이 없어.


지난 화요일, 태어나서 처음 취했다. 취했다는 것은 술 마신 뒤의 모든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몇 가지 조각들만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을 말한다. 태어나 처음 취한 다음 날 난 경악했고 실소했다. 아주 빠르게 기억의 조각을 부여잡았다. 하아. 그 기억의 조각조차 없는 편이 나았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와의 키스였다. 입 안 가득 그의 흔적이 만연한 것이 아직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도 이건 꿈이 아닐 것이다. 술은 정신력으로 마신다고 큰소리치던 나 자신은 어디로 간 걸까. 자책도 잠시,  가만있어봐 이게 몇 년만의 키스더라. 그것도 호감 있던 남자와의 키스가 아니던가. 이럴 수가. 단편적인 기억이라 키스를 '했다'는 기억나는데, 그 느낌이, 눈빛이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았다. 자책으로 가득 찬 오전을 보내고 나니, 안타까움의 오후가 찾아왔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09.24. 감독-홍상수, 출연- 정재영, 김민희, 조여정, 최화정, 고아성, 유준상, 기주봉, 서영화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관전 포인트는 함춘수(정재영)의 대사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 혹은 그 차이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며 (과연 이 행위가 가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날짜를 착각하고 하루 일찍 지방에 내려온 영화 감독 함춘수와 그림만 그리고 산다는 모델 출신의 화가 윤희정의 만남이란 동일한 소재, 같은 장소,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목할 점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나타난 두 남녀의 태도와 말투의 변화다. 둘의 만남은 복원된 행궁에서 출발한다. 함춘수는 윤희정을 보고 말 그대로 '홀딱' 반한다. 맘에 든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와 흠칫하며 경계의 날을 세우는 여자. 함춘수의 영화를 본 적 없지만 그의 이름은 여러 번 들어 알고 있는 영화 감독에게 조금 씩 마음을 여는 희정. 둘은 카페에서, 희정의 작업실에서, 동네의 작은 초밥집에서, 그리고 시인과 농부라는 카페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에 스며든다.

 


여기서 주저리주저리 영화 줄거리를 다 말하고 싶진 않으므로 전반부/ 후반부의 느낌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반부 어쩐지 함춘수는 뜨뜻미지근하다. 그냥 좋아하는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여느 나쁜 놈과 다를 바가 없다. 좋은 말을 하고, 나쁜 말은 삼키고. 그저 네가 예뻐서 좋다란 말을 하지 못해 주절주절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찌질한 남자. 반면 후반부의 함춘수는 더 솔직하다.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한 그의 감정은 눈을 흘겨줄 순 있어도 미워보이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희정의 그림을 보고 '예민함'이니 '용기'니 추상적인 말로 그녀의 앞날을 응원하는 춘수,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다 상황에 맡겨버리고 희정에게 반한 눈빛은 절대 거두지 못하는 춘수. 반면 후반부에서 희정의 그림이 '상투적'이고, '위안은 남자에게 먼저  받고'라는 식의 솔직한 평과 결혼을 하고 싶은데, 이미 결혼을 해서 아쉽다는 뻔뻔한 고백을 하는 춘수. 두 가지 모습의 함춘수를 보며 '사랑' 이란 우발적이고 강력한 감정 앞에서 어떤 자세가 좀 더 나을까 고민하게 된다.

 


영화 속 희정에게는 아무래도 후반부의 솔직한 춘수가 더 끌린 모양이다. 희정이 술에 취해 잠시 쉬러 간 사이 시인과 농부에 모인 세 사람 앞에서 바지에 팬티까지 벗으며 주사를 부렸다는 증언에도 아랑곳 않고 춘수의 행동을 귀여워해 주고, 강원도에 가자고 택시를 잡는 춘수에게 강원도 어디를 갈 거냐며 받아쳐주기도 한다.

 


추운 겨울 얼굴이 벌게지는 걸 참아내며 희정을 기다리는 춘수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짠하다. 집으로 돌아간 희정이 다시 집 밖을 나와 자신과 강원도를 가줄지도 모른다는 춘수의 작은 희망은 흩날리는 눈송이보다도 더 갸냘프게 날아가버린다. 남녀 간의 '호감'이라는 것이, 조금 더 오버하여서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이 인간을 얼마나 벌거벗게 만드는지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만큼은 그 무엇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온 몸으로 보여준다.

 


가장 좋았던 후반부 엔딩. 서로의 호감은 확인했지만 아무 일 없이 그 호감을 좋았던 추억으로 간직하며 이별을 고하는 춘수와 희정. 화양연화에서의 애절함은 없지만 하룻밤의 찌질함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편승시키기에는 충분했던 담담한 이별.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데서 오는 이상한 안도감.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솔직하게 들이대는 남자는 그 솔직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추하지 않다. 예쁘다고 말해주는 남자를 마다할 여자가 어디 있겠으며, 해맑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라면 그 찌질함도 종종 봐줄 만할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기억의 조각을 나눠 가진 그와 이 영화를 보았다. 술에 잔뜩 취한 지난밤과 달리 어찌나 멀쩡하던지. 영화를 보는 내내 춘수와 희정의 어색함에 백 배 천 배 공감을 해버리고 말았다. 맨 정신에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밤도 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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