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2018) 리뷰
난 뭘까? 어쩐지 불안하다.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했단 불안감보다 내가 가진 작은 것마저 잃게 될까봐 두렵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작은 손에 넣고 힘껏 움켜쥐는데 막상 내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게 지금 나의 마음이고, 청년의 시기를 살아가는 어느 누군가의 마음일테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을 보고 왔다. 다소 진부한 설정처럼 보였지만 그 진부함이 도리어 위로가 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사실 '고향'의 개념이 희미한 나에게 '고향'을 통해 치유받거나, 그간 잊고 지냈던 아픈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설정은 그리 설득력있지 않았지만 다소 촌스러운 그 설정 덕분에 영화 속의 작은 농담들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학수는 래퍼다. 그가 기대하는만큼 세상의 인정을 받진 못했지만 랩을 하고 살기 때문에 래퍼다. 쇼미더머니란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다섯 번이나 떨어졌지만, 여섯 번째 도전을 할 수 있는 진짜 래퍼다. 여섯 번째 오디션은 비교적 잘 풀리는가 싶더니 '어머니'란 주제를 받아둔 학수는 랩을 이어가지 못한다.
선미는 작가다. 디지털 시대에 연필로 한자한자 글을 써내려가는 아날로그 작가이자 노을을 사랑하는 노을마니아다. 고등학교 때부터 조용히 작가의 꿈을 키웠고, 마음에 간직했던 말들을 책으로 엮어내 작가가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좋아 작가가 되었지만 세상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덕에 그녀는 꽤 권위있는 문단의 작가상도 받는다.
학수와 선미는 변산 지역에서 같이 유년 시절을 보낸 친구 사이다. 선미는 학수를 짝사랑했고, 학수는 그런 선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쇼미더머니에서 여섯 번째 실패를 맛 본 학수에게 아버지가 쓰러졌으니 병원에 오라고 전화를 건 사람은 선미였다. 휴직을 하고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는 그녀는 아들없이 혼자 병과 싸우는 학수의 아버지가 안타까워 학수에게 전화를 건다.
학수에게 고향은 유쾌하지 않다. 평생을 건달로 살아온 아버지 덕에 엄마는 이른 나이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그 또한 많은 상처를 받아 고향 변산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것이었다. 선미에게 고향은 조금 다르다. 좁디 좁고 때론 답답한 곳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고등학교 시절 공허함에 쓴 학수의 시는 선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같은 노을을 바라보던 두 청춘은 한참 다른 길을 걷다가 다시 재회한다. 하루 빨리 변산을 떠나려는 학수와 그런 학수를 보며 안타까워 하는 선미가 있다.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학수는 병든 아버지를 만난 것도 모자라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일을 복수하겠다며 달려드는 동창 용대를 만나 곤란을 겪기도 한다.
학수에게 고향은 정말 X 같다. 해준 것도 하나 없으면서 X 같은 일만 만들어낸다. 고향에 관한 모든 것을 도려낼 수 있다면 그는 영혼이라도 팔 것만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감정이 다 학수의 랩이 된다. 그토록 꿈꾸던 무대룰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어머니'란 단어를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 앞에서 내뱉는 그 순간마저 랩이 되어 학수의 머리를 맴돈다. 학수는 래퍼다. 그리고 그 랩을 만든 건 학수가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유년의 기억이다.
선미는 그녀의 책에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첫사랑이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쓴다. 누군가를 사랑한 자신의 마음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너무 변해버린 첫사랑 학수를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그의 별 볼 일 없는 모습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원망하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며 힘들어 하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학수는 쇼미더머니에서 떨어졌지만, 다시 보고 싶은 참가자에 올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목이 메여 하지 못했던 말을, 애써 잊으려고 했지만 마음에 걸려 잊지 못했던 이야기를 무대 위에 꺼내 놓는다. 영화는 학수의 랩을 통해, 선미의 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거창한 메시지는 아니다. 거창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에 관객은 조금 더 쉽게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함께 하기 때문에 경쾌하다. 중간중간 웃긴 장면도 많아 가볍게 즐길 수도 있다.
학수는 래퍼다. 선미는 작가다. 나는 무얼 향해 가고 있을까. 자꾸만 제자리에서 맴맴 도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선미는 말한다. 정면을 보라고. 학수는 랩을 한다. 꺼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마음이 공허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영화다. 경쾌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넣은 몇몇 요소와 클리쉐가 눈에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할 이야기를 한다. 꿈 그리고 청춘에 대한 별 거 아닌 이야기, 진부한 이야기여도 이 이야기는 다시 할 이야기다. 마치 나와 당신의 별 것 아닌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