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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May 20. 2016

이별 운동과 기억 근육

지우려는 기억마저 선연한 근육으로 남는다.

드라마 <또! 오해영>의 매력은 이별 혹은 사랑이라는 결괏값이 아니라 그것의 과정에 놓인 여러 감정들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는 것에 있다. 예전에 사랑은 상대방과 일궈내는 하나의 결과라고 믿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사랑은 상대방의 민낯마저도 받아들이고 이마저도 이해하고 감내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오해영>에서 서현진은 결혼식 전 날 '밥 먹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파혼당한다. 시청자들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이를 모르는 서현진은 이 말에 내내 아파한다. 먹는 행위. 하지 않고는 결코 살 수 없는 그 원초적 행위를 보는 것마저 싫어졌다니. 이별의 이유에 그만큼 아프고 정확한 말도 없을 것이다.

tvN드라마<또!오해영>



그와 나는 5개월을 만났고, 이후로 장작 4개월의 시간을 친구로 지냈다. 헤어지자는 나의 말에 그는 자신이 지금 너무 힘든 상황이니 딱 한 달만 연락을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난 분명 서로에게 특히 그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자고 말했지만 모든 것은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그의 말에 이틀 밤낮을 꼬박 고민하다가 '알겠다'고 말해버렸다. 그 후 그는 연인 사이일 때처럼 내게 연락을 했다. 이별을 결심한 나는 연락에 간격을 두었고, 말도 현저히 줄였다. 나와의 이별마저 감당하기엔 지금의 상황이 너무 힘들다던 그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미 그와의 이별을 결심한 나에게 이 상황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는 점점 모서리의 끝을 향해 갔다. 서툰 솜씨로 굴렁쇠를 굴리는 것처럼 나는 둥그런 쇠고랑에 그를 넣고 아슬아슬하게 밀어냈다. 어느 순간 중심을 잃은 굴렁쇠는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나는 자꾸만 그를 일으켜 세우고 온 힘을 다해 중심을 잡았다. 평형감각을 길러준다는 굴렁쇠 굴리기처럼 그를 밀어내면서 난 마음의 평형감각을 기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그는 결국 모서리에 다다랐다. 나는 모서리의 끝에서 쇠붙이처럼 굳어진 그의 마음을 놓아버렸다.

tvN드라마<또!오해영>

 사랑이라는 무게로 그 자리에 멈춰 선 그에게 '이제 정말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네가 싫다'는 말로 모질게 채찍질을 하고 그 스스로가 모서리 끝을 향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몇 달 뒤 상처를 받고 한동안 너무도 아파했다는 그의 소식을 그의 친구에게 들었다. 너무 심한 게 아니었냐는 친구의 책망에 난 너무 억울했다. 나 또한 그를 밀어내는 모든 순간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머리로는 잊어 보겠지만,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던 나의 마음은 굴렁쇠를 굴리던 근육이 그 운동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모든 감정을 기억 해내고야 말 테니깐 말이다. 4개월 간의 이별 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고 선연한 기억을 마음에 새긴 뒤에야 끝이 나고 말았다.


굳이 이별의 감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와 함께한 시간이 생각나면 아름답게 추억하면서 그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 나의 이별 과정은 하나의 운동을 지속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강도 있게 다가왔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별에 직면한 나의 감정이 아니라, 이별의 과정을 이겨내는 그의 감정을 오롯이 목격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 더욱 날 괴롭게 만들었다. 그의 눈물을 보았고, 화를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숨이 막혀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그와의 연락이 끊기고, 완전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 그의 감정을 통해, 그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나의 감정들을 통해 난 이별과 관련된 여러 감정들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운동을 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기억들은 근육처럼 내 몸에 쌓였다.


몸의 움직임을 기억하는 근육처럼 기억이라는 근육은 이별의 감정을, 이별 한 가운데에 선 그의 감정을 모조리 축적하고 말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잊고 살다가 하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그와의 이별 운동을 떠올리는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별의 과정에서 사용하던 그 근육들이 사랑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쓰는 근육과 다르지 않아서이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에릭을 대하는 서현진의 마음이다. 지난 이별의 과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앓고 있으면서도 다시 찾아오는 사랑은 재고 따지지 않고 미친 듯 열렬히 불태우겠노라 굳은 다짐을 하는 것. 막상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나면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들을 만들어 한 순간에 좌절해 버리는 것. 그렇지만 너무 허무하게도 좌절된 마음이 그를 보자마자 금세 또 회복되어 버리는 것. 이 모든 과정이 나의 공감대를 마구마구 자극하고 용기를 내게 만든다.   

tvN드라마<또!오해영>

물론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하다.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나 그와 나 사이를 가깝게 만들지도 못한다.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흐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이별로 만들어진 내 마음속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조금 더 건강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 마음만으로도 미소 지을 수 있게 된다. 챙피해도, 아파도, 모든 것을 쏟아내도 내가 잃을 것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설령 잃는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근육이 생겨 더욱 건강해지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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