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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Aug 21. 2016

청춘시대와 셰어하우스

JTBC <청춘시대> 속 공간 이야기  

벨 에포크 (belle époque)


프랑스어로 좋은 시대라는 뜻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는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고 전에 없던 평화로 가득 찼다. 역사는 이 시기를 일컬어 '벨 에포크'라고 부른다. JTBC 방영 드라마 <청춘시대>에도 '벨 에포크'가 등장한다. '헬조선'이라 명명되는 이 시대의 청춘 다섯이 살아가는 보금자리 셰어하우스(Share House) '벨 에포크'가 바로 그것이다. 한 시대의 평화와 부흥을 일컫던 용어는 드라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하나의 공간으로 응축된다.

 

연남동에 위치한 것으로 설정된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


<청춘시대>는 외모도 성격도 다른 20대 여자 다섯 명의 동거 생활을 그린다. 그저 '버티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28세 생계형 대학생 윤진명과 아등바등 살 필요 없는 인생 '쉽게 쉽게' 사는 것이 최고라 여기는 외모 깡패 24세 강이나, 지덕체에 외모까지 고루 갖추고 색(色)까지 준비되었으나 도무지 내 남자를 만들지 못하는 22세 송지원, 러블리 그 자체에 없는 것이 자존감뿐이라 더욱 슬픈 연애 호구 22세 정예은, 보호본능 자극하는 포켓걸이지만 애어른 마인드도 탑재해 반전 매력까지 갖춘 20세 유은재. 이렇게 다섯 명은 마당이 있는 주택형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 모여 살게 되면서 오늘날 청춘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왼쪽부터 유은재(20세), 송지원(22세), 윤진명(28세), 정예은(22세), 강이나(22세)



왜 셰어하우스(Share House)일까?


청춘드라마에서 '기숙사'는 사랑과 우정이 싹트는 단골 장소였다. 캠퍼스나 동아리방도 자주 등장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혼자 사는 2030 세대를 조명한 드라마에서는 원룸 혹은 오피스텔이 주목받았고 등장인물들은 옆집에 살며 티격태격 알콩달콩 에피소드를 채워갔다. <청춘시대>는 왜 하필 셰어하우스를 선택했을까?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국내에도 셰어하우스 열풍이 불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셰어하우스 열풍은 적은 비용으로 비교적 좋은 주거환경을 누릴 수 있고, 치안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등의 장점이 부각되며 하나의 거주 형태로 정착하고 있다. 아직 정책이나 법적인 문제에 있어 안정화되진 않았지만 취미/관심사 별 셰어하우스, 세대별 셰어하우스 등 다양한 모습으로 2030 세대뿐 아니라 노인세대에게 각광받고 있다. 단순히 이런 사회적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드라마 속 주요 공간을 셰어하우스로 설정한 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셰어하우스의 사적이지만 공적인 특유의 공간 구조가 드라마의 매력을 더해준다고 보았다.



INTRO 신발장 


신발장은 말 그대로 신발을 벗어 놓는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는 공간. 벨 에포크의 메이트들은 신발장에 들어서는 순간 문을 쾅 닿으며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털썩 실내화를 내려놓으며 지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신발을 벗어놓는 순간 밖에서 애써 참았던 짜증을, 피로를, 기쁨을 쏟아낸다.

 

수수하고 귀여운 유은재의 개성이 드러난 슬리퍼


진짜 '나'일 수 있는 공간에 들어온 것이다. 그날의 기분이 모두 드러나는 예은도, 도무지 표현을 하지 않는 진명도 신발장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는 순간 안도한다. 첫 회 '출발선상의 두려움'에선 은재가 자신 몫의 슬리퍼를 실내화 걸이에 걸며 새로운 공간에 적응해가리란 걸 암시하기도 한다.


귀신이 머무는 공간,  신발장


타지에서 지친 몸을 편히 뉘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이기 때문에 '벨 에포크'는 사적인 공간이다. 다섯 명이 함께 사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민낯을 보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의 초입, 신발장에는 귀신이 산다. 송지원이 신발장에 머무는 귀신의 이야기를 한 후 네 명의 메이트들은 각기 그 귀신을 자신의 상처와 연관 짓는다. 


윤진명은 6년째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생을 떠올리며 자신이 곧 알게 될 귀신이라고, 유은재는 자신이 죽인 사람일 거라며 아빠를 떠올린다. 강이나는 자신 대신 죽은 귀신일 것이라고, 정예은은 귀신 그 두려움 자체가 본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귀신이 자신과 무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메이트들은 틈만 나면 신발장의 귀신을, 내면 깊은 곳에 담아둔 상처를 끄집어낸다.

 


SHARE  거실과 주방


거실은 메이트들이 자주 모이는 '벨 에포크'의 공적 공간이다. 소파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개인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절대 입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애써 삼키기도 한다. 정예은의 이별을 공식적으로 축하하며 나쁜 남자 찌질이 고두영의 연락처와 사진을 지우는 의식을 벌이기도 하고, 손톱이 빠져 너무 아프다는 윤진명의 울음을 함께 보듬는 공간이기도 하다. 말문이 막혔을 때 더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때 모두가 자리를 떠나는 공간이기도 하고, 함께 모여있기 때문에 각 캐릭터의 개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함께 음식을 먹는 주방 또한 '벨 에포크'의 공용공간이다. 제각기 선호하는 음식이 다르듯 메이트들은 각각 다른 성향을 가진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식구라는 말이 생겼다는데 함께 음식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며 메이트들은 또 다른 의미의 가족이 되어간다. 자기 몫의 컵이, 그릇이, 음식이 있지만 맥주캔을 부딪히며 결국 마음을 하나로 모으더니 뒤엉켜 싸우기도 하고 소소한 하루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유은재가 벨 에포크에 처음 왔을 때, 유은재의 잼은 언니들의 표적이 되어 아주 빠르게 없어진다. 이것에 분노하는 유은재와 아무렇지 않게 '사줄게~'라고 답하는 언니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집에서 내가 아껴둔 푸딩을 언니가 홀랑 먹고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던 기억이 뒤엉켜 떠오르면서 어릴 적 즐겨있던 소설 <작은 아씨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벨 에포크'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이 룰은 이들의 유대를 유지하며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송지원의 말을 빌려 룰을 설명하면 '누구나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이 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완벽히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울음이 터진 메이트를 따듯한 가슴으로 안아줄 수도 있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코 상대를 내 맘대로 속단하려 하지 않는 것. 설령 그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들의 룰이다. 사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유하면서도 그들이 여전히 당당하고 그들 다울 수 있는 비결이다.


공적인 공간인 거실과 주방의 에피소드를 보면 '벨 에포크'는 작은 사회다. 마치 가족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처럼 사람과 사람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작은 사회. 끊임없이 충돌하고 그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곳. 그 과정에는 언제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다.



PRIVATE? SHARE? 화장실


유은재와 강이나의 첫 만남은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 어쩌면 가장 사적일 수 있는 공간 화장실. 필자가 13명의 룸메이트를 거치는 긴 기숙사 생활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혼자라고 느꼈던 공간이 화장실이었는데, 은재에게 화장실은 그마저도 용인되지 않았다.



서로 서운함을 말하는 자리에서 윤진명이 유은재에게 볼 일 보면서 수돗물 틀어놓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은 셰어하우스에서 화장실이 사적이지만 결코 사적일 수 없는 공간임을 인지하게 만든다. 밖에서도 물소리와 볼일 보는 소리 혹은 물소리와 우는 소리 정도는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공간이 모두와 공유되는 공적인 공간처럼 여겨지는 순간 우리는 당황한다. 하지만 눈 감아줄 수 있는 일을 눈 감아주는 배려가 그들이 서로를 믿고 공간을 셰어하게 하는 건 아닐까.



PRIVATE 침실 


정확히 말하면 침실이 아니라 침대라고 하자. 셰어하우스에서 가장 사적인 장소가 아닐까. 지원과 예은은 함께 방을 쓰지만 진명과 은재도 함께 방을 쓰지만 침대에서 그들이 밤새 울었던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함부로 아는 척하지도 않는다. 오지랖 넓게 끌어안지도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침실은 아니 침대는 룸메이트의 배려 덕에 사적인 공간이 된다.



침실은 각자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기 취향의 옷과 가방 그리고 침구류를 통해 개인의 특성이 더 잘 드러난다. 메이트들은 자신의 가방이나 옷을 빌려주며 상대방의 작은 변화들을 이끌어낸다. 한 때 내가 잠을 자는 시간 동안 누군가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같은 공간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 참 위안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불속은 세상 가장 안전하고, 그 안전함을 공유하는 사이가 바로 룸메이트다.

 


OUTRO 발코니


발코니는 다섯 명의 룸메이트가 바깥세상을 보는 공간이다. 언제나 건조대에 걸린 속옷들이 여전히 사적인 공간의 '벨 에포크'를 상징하지만 발코니의 창문은 바깥과 안의 경계다.

 


하우스메이트들은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메이트들의 모습을 발코니의 창문을 통해 보기도 하고, 여전히 두고 오지 못한 바깥일의 고민들을 발코니 창문을 쳐다보며 지속하기도 한다. 하우스메이트들은 강이나의 연애를, 유은재의 첫 키스를 목격한다. 윤진명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박재완을 몰래 쳐다보기도 하고,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기도 한다. 가장 안전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 발코니의 창은 혼자 또 함께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 매개가 된다.

 


왜 '벨 에포크'였을까


<청춘시대> 속 주인공들은 오늘 날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하다. 누군가는 사랑을, 섹스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당장 숨통을 조여 오는 빚 때문에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같은 집이지만 다른 고민이 있고 함께 하지만 결코 함께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우리 시대 청춘들이 겪을 법한 고민을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공적인 공간 셰어하우스에서는 내밀하게 그려낼 수 있다. 메이트들은 각자의 시점으로 서로의 민낯을 목격한다. 보고도 모르는 척 혹은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까워진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쳐오고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지만 그들은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된다. 결국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것 그 자체가 '벨 에포크' 좋은 시절이다. 청춘에게 '변화'는 중요한 키워드다. 타인과의 생활을 공유하면서 서로 자극이 되고 안정이 된다. 나 다울 수 있는 부분은 점점 나 다워지고, 혼자서는 절대 알 수 없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삶을 목격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하면서 나 아닌 타인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벨 에포크'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시절이 아닐까. 앞으로 펼쳐질 다섯 청춘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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